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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ug 23. 2022

여름에 만난 사람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올해 들어 다시 블로그에 무언가를 올리고 있다. 가끔 15년 전 오늘을 보여주기도 하는 오래된 블로그이지만,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래도 재작년 여름에는 빽빽하게 일기를 올렸는지 거의 매일 2년 전 오늘의 글을 발견하고 있다. 20년 8월 한 달 동안 ‘챌린지’에 참여했던 흔적이었다.

 챌린지를 이끈 에리카와는 하트와 댓글로만 교류를 하는 사이였다. 인스타그램에서 친구의 지인의 지인 정도 되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에리카가 내 그림에 하트를 누르고 내가 에리카의 글에 댓글을 달며 살짝 가까워졌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에리카는 반갑게도 대구 사람이었다. 겨울에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에리카 챌린지’를 모집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예닐곱 명이 모인 채팅방에서 8월 한 달 동안 매일 함께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아침마다 감사의 한 마디를 기록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챌린지’라는 단어가 생소했지만 ‘이것도 인연인데’ 하며 도전해보았다. 에리카의 브런치에 있는 문장은 강하면서도 섬세했다. 또 에리카의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친해지고 싶었다. 인스타그램 피드와 브런치의 글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에리카의 팬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또 지난겨울에 브런치 작가 도전에 실패했었던 것이 마음에 남아 있던 참이었다. 이 기회에 브런치 작가가 되어 보자. 오랜만에 의욕을 가지고 힘을 내보리라.

 눈을 뜨자마자 세 가지의 감사한 일을 찾아 쓰기란 쉽지 않았다. ‘맑은 하늘, 간밤에 숙면, 어린이집 가는 날’ 평일에는 늘 같은 감사의 글을 올렸다. 다행히 운동은 요가학원에 가거나 아이를 따라 놀이터만 가도 인증이 쉬웠으나, 안 쓰던 글을 쓰려고 하니 힘이 많이 들었다. 대부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절대거나, 카페에서 그림 그리는 사진을 올렸다. 도저히 글감이 없을 때는 책장을 뒤져 좋아하는 문장들을 옮겨 썼다. 어떤 내용을 쓰든 간에 에리카는 정성이 가득한 비밀 댓글을 달아주었다. 초등학교 일기장에 선생님이 빨간 펜, 파란 펜으로 써주던 칭찬의 한마디를 읽을 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며 뿌듯했다. 마흔이 다 되어서 여동생뻘 아이가 해주는 따뜻한 말에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자신이 좀 웃겼지만, 그런 게 팬심이 아니겠는가. 에리카는 말했다. “저도 뭐 특별한 사람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내가 나댄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이런 말들이 나에게 용기가 되었다. 내 블로그에 내가 쓰는 글인데 허접하면 어떻고 하찮으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누가 와서 내 일기를 굳이 찾아 읽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단 말인가.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온라인 뒤풀이를 하던 날은 몹시 즐거워 헤어짐이 아쉬울 정도였다. 나는 에리카에게 감사의 의미로 그림을 그려주었고, 데이트를 신청했다. 여동생과 셋이 만나 대구에 있는 예쁜 카페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에리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나는 에리카를 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용기와 경험을 가진 사람에 대한 동경과 선망, 한층 남루하게 느껴지는 나의 30대를 보는 애석함, 자신감과 확신으로 채워진 건강한 정신에 대해 부러움과 질투심까지. 나는 에리카가 나를 더 잘 알아주었으면 하는 소심한 마음과 나의 절박함은 몰랐으면 하는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교류를 이어나갔다.

 어영부영 댓글로 안부를 주고받다가 에리카는 캐나다에 있는 대학으로 떠났다. 한동안은 인스타와 블로그로 쭉 지켜보았지만, 캐나다에서의 일상은 말 그대로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아서 잘 안 보게 되었다. 에리카가 올리는 아름다운 캐나다의 숲과 강을 볼 때마다 우리가 나눈 대화가 떠오르곤 했다.
“저는 여행 자체도 크게 즐기지 않고 해외여행은 아예 관심이 없는 편이에요. 그런데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빨간 머리 앤을 보고 처음으로 캐나다에 가고 싶어 졌어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근데, 어느 세월에 제가 거기까지 갈 일이 있겠어요?”
에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왜요? 거기 갈 수도 있죠! 우리가 캐나다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잖아요?”
나는 바로 주눅이 들어버렸다. ‘하하, 그렇죠? 지레 안 된다고 해버렸네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가 정한 나의 한계선은 예나 지금이나 바닥이구나’ 싶었다.
 챌린지 기간이 끝나자 당연한 일이지만 정성스러운 비밀 댓글이 없었고, 나는 아주 간단하게 일기 쓰기에 흥미를 잃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겠다는 의욕도 스르르 사라졌던 어느 날, 친구와 책방에 놀러 갔다가 책방지기와 요즘 유행하는 글쓰기 챌린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챌린지 리더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했던 글쓰기에 대해 말했다.

 어떤 동력이든 간에 글을 쓰는 건 좋았지만, 막상 리더와 친해진다는 목적을 이루고 나자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고. 스스로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글쓰기는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 건가 싶어서 스스로가 더 싫어졌다고. 지금 이 말을 하면서도 솔직함이 지나친 것 같아 부끄럽다고 했더니 책방지기가 며칠 전 북 토크에서 정혜윤 작가에게 들은 말을 전해주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글을 쓰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묵은쌀로 여겨왔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은 이야깃거리들이 그윽하게 익어가는 열매나 반짝이는 진주가 되기를 바라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던 시절은 지나갔다. 퍼내고 퍼내도 남은 누렇게 묵은쌀이 가득해, 가만히 두었다가 어느 날 열어 보면 쌀벌레가 잔뜩 있을지도 모르는 오래된 쌀통. 이게 내가 가진 곳간이었다. 어떻게 좀 씻어서 밥을 지어봐도 맛이 없겠지. 이대로 버려야만 하나.

 나 따위가 나서서 뭘 해도 될까 하는 내 눈치를 보고 또 보며 살았는데 지금의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글방, 일기 방, 블로그와 브런치에 꾸준히 무언가를 써내고 있다. 때마침 한참 전부터 준비했던 에리카의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에리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챌린지 후에 한동안은 글을 쓰지 않았지만, 요즘은 나도 글을 쓰고 있다고. 브런치 작가도 되었고, 웹진에 투고한 글도 실렸다고 했다. 늦게나마 에리카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에리카는 웃음이 가득한 응원의 답장을 보내주었다.

 곳간의 묵은쌀들은 어쩔 수 없다. 방앗간에 가져가서 가래떡이라도 뽑아야지. 그래도 남으면 재료를 좀 더해서 흑미 카스텔라처럼 맛난 떡이라도 만들면 더할 나위가 없겠는데.



#미루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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