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다'는 동사입니다

좋아하기에도 바쁘다

by 원효서

2W 매거진 27호에 실렸어요.

https://m.blog.naver.com/2yjyj/222863985593


‘좋아하다’는 동사입니다.

‘덕질’이라는 단어를 보기만 해도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메들리가 들려온다. 하이도의 뒤집어질 듯한 경쾌한 목소리, 모노크롬의 음울한 사운드, 지브리와 가이낙스 애니메이션들, 왕좌의 게임 오프닝 송이 귀에 쟁쟁하다. 리스트를 쓰는 속도가 회상으로 흐르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어 어질어질하다. 노년에는 젊은 시절 사랑했던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데,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흥얼거리는 할머니라니. 상상하기 쉽지 않다.

본래 미디어 콘텐츠에 잘 빠지는 편이다. 어떤 콘텐츠에 빠지면 끝없는 반복 재생이 기본값이다. 수백 번씩 반복해서 듣는 음악들, 상황에 맞게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들, 장면과 대사를 외울 만큼 본 영화와 드라마에 대해 말하자면 며칠이 걸릴 것이다. 만사에 흥미를 잃는 이른바 ‘인생 노잼 시기’에도 뭔가 하나는 건져낼 수 있다. 일단 책, 책에서 실패하면 영화, 영화도 별로면 드라마, 안 되면 웹툰, 팟캐스트! 나 하나 풍덩 빠질 자리는 언제 어디에나 있어왔다. 그 많은 리스트를 제치고 오늘은 드라마 딱 두 개만 떠올려 보기로 한다.

권해준 아이가 ‘분명히 언니 취향’이라고 했던 ‘셜록’은 정확히 내 취향 드라마였다. 나는 괴팍한 천재 주인공에 열광하고 영국 영어 듣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천재 탐정이 정신이 나간 미치광이 살인자를 쫓는 이야기에, 화면과 음악이 근사하고 편집이 세련된 드라마라니 반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는 입덕의 진입장벽이 높았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이하 베니)는 소문대로 잘생김도 연기할 줄 알았고, 목소리가 아름다웠다. 시즌 2까지라고 해봤자 달랑 6편이었기 때문에 아주 빠르고 깊게 덕후가 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는 정말 오타쿠스럽게 드라마 해설집 비슷한 책을 사서 샅샅이 읽었다. 표지 사진이 남부끄러울 정도로 클로즈업된 베니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포장지로 싸서 들고 다녔다. 친구가 구글링 해준 드라마 대본을 프린트해서 읽었으며, 버스에서 음악 대신 드라마를 들으며 다녔다. 중요한 장면일 때는 멀미가 좀 나더라도 화면을 쳐다보았고, 피곤할 때는 ost를 들었다. 그다음에는 셜록 홈즈 전집을 사서 읽었다. 알라딘에서 굿즈를 고를 때에도 셜록 홈즈 프린트를 우선으로 골랐고, 겨울에는 최대한 드라마에서 본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롱코트를 샀다.

셜록에 대한 애정이 식기 전에 영화 스타트렉-다크니스가 개봉했고, 덕후의 심장은 실컷 쿵쾅댔다. 스타트렉을 외울 정도로 본 다음에는 반 고흐와 스티븐 호킹을 반복해서 봤다. 그가 찍은 거의 모든 영화를 찾아보았다. 대부분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팬심이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영화도 있었고, 출연 비중이 너무 적은 것도 있었다. 베니가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되고부터는 할리우드 대스타의 반열에 올랐지만, 원래부터 아주 멀리 있는 존재였기에 무의미한 질투심은 생기지 않았다. 셜록 시즌4는 잊어버리고 싶고 닥터 스트레인지 2에 살짝 실망했지만, 베니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다. 올해 본 ‘파워 오브 도그’ 도 굉장했으니까.

또 하나의 반복 재생 영상으로는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이 있다. 2007년에 시작해 2019년에 시즌 12로 완결한 장수 시트콤이다. 지금 초반부를 다시 보면 무지하고 차별적이고 빻은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오지만, 그렇다고 내가 주었던 마음을 다 거둬오지는 못할 것이다.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은 아예 견디지도 못할 인생 노잼 시기에 내가 멍 때리며 보기로 정한 것은 ‘빅뱅이론’이 되었다. 한 편이 20분 내외로 짧고 시리즈가 길어서 싫은 부분은 적당히 스킵해가며 낄낄대며 볼 수 있었다. 몇 번을 봐도 항상 웃는 장면, 늘 감동하는 부분이 있다. 결혼기념일에 하워드가 친구들과 함께 베르나데트에게 불러주는 노래, 레너드와 페니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에피소드, 레너드가 엄마 베벌리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장면...

주인공 쉘든은 셜록처럼 ‘괴팍한 천재’ 스타일이고, 절친 레너드는 왓슨처럼 주인공을 수습하는 착하고 다정한 친구이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교류 전반을 어려워하는 주인공 쉘든(이공계의 우영우 같다)이 좋았다. 안하무인에 눈치가 없으나 거짓말은 하지 않는 친구라는 점, 남들이 보면 비웃을 만한 어린애 같은 취향과 유치한 취미에 당당하게 푹 빠진 어른이라 더 매력적이었다. 셜록과 쉘든은 비상한 머리와 반비례하는 처세술을 가졌다. 똑똑하지만 멍청하고, 반사회적인 언행을 일삼는 듯 보여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남들이 비웃건 말건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고, 연애나 성적인 관계에는 무심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정한 자기만의 룰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기 확신의 화신들이다. 그래서 아주 매우 몹시 좋았다.

빅뱅이론의 마지막 시즌이 나왔을 무렵에 나의 반복 재생 취미도 거의 막을 내렸다. 아이를 키우게 되자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는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육아와 함께 우울증과 강박증이 되돌아왔는데, 셜록도 쉘든도 나를 구해줄 수 없었다. 나를 구해준 것은 어린이집과 정신과 약이었다. 덕질도 기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 좀 쉬어야 했다. 아이가 네 돌이 지난 지금은 적절한 덕질의 선을 찾았달까. 모자라는 시간을 빠듯하게 활용해서 이것저것 본다. 외장하드에 들어 있는 것들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좋은 영화와 드라마를 신중하게 골라서 본다. 웬만하면 엔딩을 봐야 하니 아무거나 볼 수 없다. 보고 싶은 작품이 보이면 제목을 메모하고 넷플릭스나 왓챠에서 찜을 한다. 할 일을 다 한 밤에 오프닝 화면부터 몰입해서 제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보고 싶은 작품들이 어찌나 많은지, 알라딘 장바구니가 미어터지는 것처럼 넷플릭스의 찜 목록은 늘어만 간다. 관심 목록에 추가된 에반게리온 포스터를 볼 때마다 또 ‘잔혹한 천사의 테제’가 울리고 전편을 복습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지만 오늘도 이겨낸다.

“나는 두려울 때 보이저를 생각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보이저 1호의 미션은 멀리 가는 거였어. 목성, 토성, 그들의 위성을 다 봤지만 보이저는 계속 나아갔어. 내가 인도에서 미국으로 떠나올 때 난 무서울 게 없었어. 내 앞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다고 생각했지. 무서운 생각이 들 때면 난 떠올렸거든. 보이저는 여전히 가고 있다고. 태양계 너머의 어딘가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먼 곳을 향해서."
인생이 위기에 처한 쉘든에게 라지가 해주는 대사이다. 내 인생의 방향이나 꿈에 대해서는 라지처럼 진취적인 용기를 낼 수 없다. 현실적인 문제는 꿈을 꿔도 해결되지 않고, 의욕을 가진다고 뜻대로 풀리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덕질은 다르다. 덕질을 향해 보이저 1호를 떠올릴 수 있다면, 힘을 낼 수 있다.

넷플릭스에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 이 올라왔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보러 가야겠다. 반복 재생은 그만하려 했지만, 나의 닥터 스트레인지가 큰 비중으로 나왔으니까, 나는 두 명의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다. ‘좋아하다’는 동사니까 또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