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 일기

한밤중에 작약 꽃잎이 스슷 소리를 내며 더 벌어지는 순간

by 원효서



태블릿 거치대에는 다운튼 애비 시즌 3을 틀어놓고 그림을 그리느라 눈이 바쁘던 밤 10시, 마침 드라마 한 편이 끝나 화면을 멈추었다. 더러워진 물을 새로 받을까, 그리던 페이지를 멍하니 보던 찰나에 오른쪽에서 슷!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식탁 옆 아일랜드에 올려둔 꽃병에서 난 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아이를 재우러 들어가던 시간까지도 동그란 봉오리였던 한 송이가 확 피어난 게 아닌가. 저녁나절에는 밥 하랴, 애보랴, 설거지하랴 집안일로 바빠서 코앞에 놓인 꽃송이가 어떤지도 몰랐다가 조용한 밤중에 되어서야 바라본 거였다. 아마도 내가 분주하게 오가던 저녁시간부터 꽃송이가 벌어지고 있었겠지. 운 좋게도 내가 들었던 스슷하는 소리는 꽃송이가 활짝 열리면서 꽃잎끼리 부딪힐 때의 마찰음이었지 싶다. 혹시나 움직이는 꽃잎을 볼까 싶어 한참 꽃병에 시선을 주었지만 내 눈에 보일만한 움직임은 없었다.

메모장을 열었다. "한밤중에 작약 꽃잎이 스슷 소리를 내며 더 벌어지는 순간"이라고 썼다. 무얼 그릴까 비어있던 공간에 로즈매더와 짙은 빨강을 섞어 작약 꽃잎을 그렸다. 잠들지 않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동생에게 알렸더니 "너무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했다.


극적일만큼 탐스럽던 꽃송이는 금세 후드득 져버렸다. 천천히 말라가거나 시들어가는 꽃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루 이틀쯤 지났을 때지 싶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 많던 꽃잎이 식탁에 다 떨어져 있었다. 자잘한 물건을 모아두는 상자에까지 들어간 이파리들 덕분에 오랜만에 식탁 옆 노란 상자의 먼지도 한 번 털었다. 두 손 가득 모아도 넘쳐나는 꽃잎들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질 법도 했지만, 바쁜 아침이라 급히 싱크대 휴지통에 털어 넣었다. 나머지 한 송이는 며칠 더 버텼지만 부산에 다녀온 저녁에 보니, 아니나 다를까 와르르 떨어진 꽃잎이 식탁에 흩어져있었다. 그렇게 작약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