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구덩이>의 주인공 히로가 파는 구덩이는 멋지다. 깔끔하다. 히로는 할 일이 없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고, 충분히 판 다음에는 거기에 앉아 동그란 하늘을 바라본다. 실컷 앉아 있다가 다시 구덩이를 메운다. 나도 히로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다. 팔 땅도 없고 삽질이 힘든 나의 구덩이는 나무 아래에 있는 의자였으면 좋겠다. 나뭇잎과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심호흡하고 싶다. 해가 지도록, 노을이 사라질 때쯤에야 툭툭 엉덩이를 털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좋은 오후였어.’하고 싶다.
혼자 붙인 ‘프로 취미인(프로는 돈을 번다는 지적은 넣어두자)’이라는 별명대로, 운동하고 그림 그리고 글도 쓰고 책도 보려면 9시부터 4시까지 바빠도 너무 바쁘다. 집안일과 친구와 모임도 포기할 수 없으니 하고픈 일을 다 하면 즐겁지만 기진맥진해,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쉬고 싶은데 유치원에 간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나의 시간은 몽땅 아이에게 맞춰 흘러간다. 미끄럼틀 옆이나 편의점 앞 어디쯤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노을은 고층 아파트 사이의 좁고 긴 직사각형 하늘에 펼쳐진다.
14시간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던 고등학교 때, 자습 시간에 친구와 소곤대며 꾸던 꿈이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만화책과 주전부리로 가득한 방에서 혼자 사는 꿈이었다. 멋지고 근사하기는커녕 ‘은둔형 외톨이’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꿈이라니…. 보고 싶은 만화책이 계속 채워지기만 한다면, 프링글스와 몽쉘통통이 있다면, 그곳에 행복은 반드시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런 허황한 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구덩이>를 읽지 않았더라면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을 내 구덩이는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영화 <메기>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해야 할 일은 그 구덩이를 더 깊이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에 나오는 싱크홀처럼 나의 구덩이는 깊고 어두웠고 예상할 수 없는 어두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내 삶이 구덩이에 빠졌다고 확신했을 때, 그 구덩이는 나의 것이었지만 머물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내가 빠진 구덩이는 우울의 구덩이, 무기력의 우물, 혼란의 늪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찾지 못한 나는 ‘어른의 구덩이는 본래 슬픈 법이야.’ 하며 체념 속에서 억지 고요를 찾으려 했다.
살림살이와 육아가 내 삶의 전부가 될 거라면, 어릴 적부터 배운 그 많은 지식은 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도 나에게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 적 없는 일들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 나는 수렁과도 같은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빛나고 아름다운 글들 대신 불행의 전시로 순위를 매기는 자극적인 인터넷 게시판을 들락거렸다. 훌륭한 영화를 보는 대신 솔루션이란 이름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할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흥분했다. 못된 단어들로 채워진 시절들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라고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어둡고 쓸쓸한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세상의 햇볕을 쬐고, 여러 가지 즐거운 놀이를 찾아낸 지금, 내가 파는 구덩이는 제법 근사하다. 많은 글을 읽지는 않았지만, ‘무용한 것들의 가치’를 찬양하는 말(내 말도 이랬으면)이 많아진 세상이다. ‘쓸모 있고 돈이 되는’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달려가는 세상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세상이기도 하다. ‘완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영화와 책들이 쏟아져 나와서 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은 줄어들지 않는다. 찾아보느라 즐겁게 허덕인다. 놀이터에 책을 들고나가고, 밤잠을 줄여 영화를 한 편 더 보며 살아야겠다고 자못 진지하게 다짐한다.
“책에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답 비슷한 그 무언가가 있을 가장 높은 확률을 찾는다면 책이 최선이다.” <철학의 위안-알랭 드 보통> 1년 가까이 찔끔찔끔 읽어나가는 책에서 멋진 문장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짧은 순간을 작고 소중한 내 구덩이에 간직하기로 한다. 이틀 치 그림일기를 몰아 그리면서 빈자리에 방금 읽은 문장을 써넣는다. 읽다 만 책들이 펼쳐진 아일랜드 식탁과 내 그림책이 꽂힌 전면 책장, 알록달록한 팔레트와 까만 일기장을 보며 속으로 말해본다. ‘이건, 내 구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