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초의 구급대원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3)

by 소방관아빠 무스

(사진-네이버 블로그 '살아보면 알게 되는 것')


난 부산에서 태어났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짙지 않다. 매일 보던 골목과 콘크리트 건물, 도로와 전봇대, 도시 사람들... 항상 보아왔던 곳에서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굳이 고향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부산 아미동이란 곳에 국수골목이 내 고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서부경남에서 이곳 부산으로 올라오셔서 어머니를 만났고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바로 아미동 국수골목이었다. 이곳은 부산의 관광지로 유명한 감천 문화마을로 올라가기 전에 있는, 한마디로 '못 사는 달동네'이다. 일제 시대에 이곳은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묘지 터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영락공원이나 추모공원쯤 되겠다. 하지만 광복이 되고 그들이 물러가게 되면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인구는 이곳에도 집을 짓게 했는데 집 지을 재료가 없자 일본 사람들의 묘지터에서 빼낸 비석 등을 부자재로 사용해서 지었다. 그래서 이 동네를 요새는 '비석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부 경남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도심에 번듯한 집을 구할 수 없었던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이곳 비석마을 국수골목에 터를 잡으셨다. 비석 마을 초입에 국수가게 두 세 곳이 영업하던 국수골목, 그곳이 바로 내 어린 기억이 시작된 곳이다. 국수골목에 대한 처음 기억은 어머니의 포대기 위에서 그 골목을 오가며 봤던 광경이다. 빛이 바래고 여기저기 떨어진 파란 천막을 쳐놓고 가게 안에서는 김이 펄펄 나도록 큰 솥에 국수를 끓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나무탁자에 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오래된 맨홀뚜껑에는 손님들이 먹다 남긴 국수 건데기와 고명들이 김을 내며 버려져 있었다.


우리 집은 국수가게에서 약 20~30미터쯤 위에 있었고 국수가게는 버스가 다니는 큰길과 맞닿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국수가게 앞을 거쳐 가야 했다. 내가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그 앞을 지나며 가끔씩 국수 한 그릇을 사서 먹어보라며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처음 먹어보는 국수맛은 약간 짭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지금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그런 맛이었다. 나에게는 이게 바로 고향의 맛이 아닌가 한다. 성인이 되어 불현듯 생각이 나서 그곳을 찾아가곤 했는데 지금은 며느리가 가게를 물려받아 하고 있다고 했다. 영 옛날 맛이 안 났지만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국수골목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겨우 걸음마를 하던 시기였나 보다. 엄마 말로는 내게 걸으면 '삑삑' 소리가 나는 신발을 하나 사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난 그게 신기했는지 혼자서 그걸 신고 집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한걸음 한걸음 뗄 때마다 '삐약 삐약' 병아리 소리가 들리는 게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가 집밖으로 나갔는데도 엄마는 부엌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세탁기도 없었고 부엌바닥에 다라이(?)를 놓고 빨래판에 옷을 빨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말로는 밖에서 '삐약 삐약' 소리가 들리니 안심했다고 한다. -그때는 도로에 차가 그다지 많은 때가 아니었다. 우리 집이 있는 국수골목은 어쩌다 차가 한 대 들어오면 그게 그저 신기한 날이었다.- 그 소리가 멀어지면 데려와야지 하고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끼이익!~"


하는 애기 신발에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심상찮음을 직감한 엄마는 고무장갑을 벗을 생각도 않고 버선발(?)로 밖에 나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삑삑이 신발이 벗겨진 채로 초록색 포니 택시 앞에 누워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잔뜩 화가 난 택시 기사는


"이 아가 아줌마 안교?" (이 아이가 아주머니 아이입니까?)


라고 역정을 내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니, 물어본 게 아니라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아주매가 아를 이래 길에 내보내몬 어짜요!" (아주머니가 애를 이렇게 길에 내보내면 어쩝니까?)


하고 재차 호통을 치자 엄마의 눈에서는 이유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서슬 퍼런 택시 기사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데


"아 똑띠 키우소!" (아이 똑바로 키우십시오!)


이렇게 호통을 치고는 택시기사는 다시 택시를 타고 가려고 하더란다. 그런데 그 시절 그 골목에는 양아치는 아니고 건달(乾達) 형님 두세 명이 살고 있었다. 불의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그 시절 부산의 모든 골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보소!, 택시 기사 양반, 아무리 그렇타 해도 이렇게 아를 치아놓고 가면 어짜요?" (여기부터 번역 생략!)


"이 사람들이 뭐라카노, 그럼 나보고 우짜라고?"


"그래도 아를 치았으몬 병원에라도 데꼬 가야지!"


(택시기사와 건달 형님들의 대화는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는 그 택시기사와 건달 형님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나에게 와서 내 상태를 살펴보았다. 내가 축 늘어져서 의식도 없고 숨도 쉬는 것 같지 않더란다.


"아이고! 우짜꼬!~ 우리 **이가 숨을 안 쉰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게 포인트!)


그런데 엄마의 이런 SOS신호에 누군가 화답해 주는 이가 있었다.


"저~ 밑에 한약방에 가봐라!"


엄마 말로는 그때 누가 소리쳤는지, 어디서 그런 소리가 들렸는지도 알 수 없더란다. 그저 '한약방'이란 말만 들렸고 국수골목을 오가며 보이던 국수가게 맞은편 한약방이 생각나더란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초인적인(?) 힘이 솟아나면서 나를 들쳐업고 국수 골목을 쏜살같이 뛰어내려가 국수가게 맞은편에 있는 이층 한약방에 당도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한약을 지으러 온 손님과 침을 맞으러 온 손님으로 바글바글했지만 엄마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나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단다. 엄마는 한약방 문을 부서져라고 열면서 소리쳤단다.


"우리 아가 숨을 안 쉽니다!"


한약방에 있던 한의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눈들이 입구에 있는 엄마와 내게 쏠렸고 한의사는 엄마에게 손짓으로 자기에게 오라고 하더란다.(그때 그분이 한의사 자격증을 갖고 진료를 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벌써 '응급의료의 중요성'을 깨달은 명의였음이 분명하다.) 그분은 내 눈을 까뒤집어 보는 등 몇 가지 간단한 진찰(?) 후에 자신의 필살기인 침을 꺼내어 내 몸의 몇 군데에 놓는 것으로 나의 의식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사고를 낸 당사자인 택시기사가 몇 명의 건달 형님들에게 붙들려와 나의 진료비를 계산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그 사건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어느 햇살 좋던 날이었다. 처음 신어본 '삐약 삐약' 소리가 나는 신발이 좋아서 한걸음 한걸음 그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간 기억밖에 없다. 그 후의 일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들어 내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그렇다, 그 국수골목에서 엄마는 내 생애 최초의 구급대원이었던 것이다. 난 그 후에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그중에 절반이상이 엄마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엄마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의식을 잃은 나를 회복시켜 줄 응급의료체계가 이미 국수골목 안에 있었고 엄마라는 유능하고(?) 열정적인 구급대원이 내 곁에 있음으로 해서 나는 내 생애 최초의 위기에서 벗어나 실낱같은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엄마가 늙고 비록 나 또한 늙어가지만 이제는 내가 엄마의 구급대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월의 햇살 좋은 어느 날, 삐약이 신발을 신고 햇살 속으로 걸어갔던 한 아이가 기억난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그 아이는 어느 새 자라서 벌써 엄마를 부축해 줄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의 생에 마지막 구급대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