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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연고 Jun 26. 2024

이사의 묘미

공감에세이

이사는 미묘하다.


잊고 지내던 나를 다시 만나게도 되고, 담고 있던 것들을 뒤로한 채 새로운 나를 보게도 한다.


그 많은 이사를 하는 동안 아쉬운 마음을 머금고 책들을 많이 처리해 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늘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책들도 있다. 새로 불어난 책들 사이에서 다시금 처리해야 할 책들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책을 하나씩 확인하며 책 안에 혹시 꽂혀 있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던 중이었다. 주르륵- 책장을 넘기는데 얇은 종이 하나가 끼여 있었다. 내가 전에 썼던 러브레터였다. 책상 위에 있던 공책 한 장을 찢어, 들고 있던 검은색 볼펜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듯해 보였다.


책 사이에서 찾았다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자 굉장히 즐거워한다.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결혼 전에 줬던 것이라고 한다. 오글거리게.. 이런 문구를 내가 왜 적었지 싶었고. 이렇게 성의 없이 줄이 그어져 있는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서 줬다니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때도 무던한 성격인 건 똑같았던 것 같고, 지금보다 어렸고 좀 재밌었던 것 같다.


옷의 반을 덜어내고, 책의 반을 덜어내고, 내 마음의 짐 반을 덜어낸다. 그렇게 덜어낸 후 차마 아쉬운 마음에 다시 물건들을 집어 담으며, 내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내 마음에 담아둔다.


버리는 즐거움이라는 게 있다. 채워져 있던 것을 비울 때 느끼는 쾌감과도 같다. 가득 차 있던 서랍장을 비워내고 빈 공간을 바라보다 보면, 시작과 끝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비워냄으로써 가벼워질 수 있고, 옮겨 담음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모색해 볼 수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새로 다가올 순간에 대한 묘한 흥분도 느끼게 된다.


나를 비워내는데도 나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사의 묘미다.




사진에서 창문 앞 기둥에 도르래 같은 게 보여요. 네덜란드의 아주 오래된 집들은 저런 도르래에 밧줄을 매달아 이사할 때 짐을 옮긴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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