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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Oct 19. 2021

'아드 리비툼'의 삶



예전부터 나는 '자기 개발서'라는 책들이 잘 안 읽혀.

읽을 때마다 자괴감 비슷한 것이 느껴지거든.

그 분야의 책마다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TO DO' 리스트들이  내겐 참 벅차고, 지속이 되지 않았어.

그들이 제시하는 건 시간을 평평하고 고르게 편 후, 인절미 자르 듯 목적대로 반듯이 잘라, 조금도 허투루 쓰임 없는 밀도와 속도를 내는 삶인 것에 반해,

폭식처럼, 벼락공부처럼, 졸부처럼, 꺼짐과 용솟음이 반복되는 불규칙한 곡선의 내가 그 책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엉망진창이 되는 게 무서웠던 거야.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각자의 '자기'가 다른데 '자기 개발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왜 비슷한 말들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집을 지을 때조차 지역에 따라 지붕 모습이나 자재를 달리하는 건 부여받은 지역적인 습성과 약점을 버티고 순응할 힘을 실어 주려는 것일 텐데, 왜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고 같은 모습이 되려 애쓰며 살아가는 걸까...


나는 기분이 처지고 무기력해지려 할 때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을 읽어.

마치 오후 3시 즈음, 아직 하루의 할 일이 남아있는데 텐션은 떨어질 때, '위로'하듯 입에 넣는 초콜릿처럼 오물오물 그녀를 읽지.

엉뚱한 상상, 특이한 생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깨끗하고 단조롭게 표현하는 그녀만의 방식이 나는 정말 좋거든.

그녀의 글 속에는 내가 있어.

나의 어떤 부분-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영역의 행동-들을 그녀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에 놀라고, 공감하고, 위로받고, 마침내  안도해.

그러는 동안 나는 점점 떠올라.

둥싯 둥싯 마음이 부풀고 힘이 차오르는 게 느껴져서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져!

내 안의 잠들었던 거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 기지개를 켜는 거지!!


'자기'를 안다는 건 정말 소중한 거야.

나는 닦달해서 될 사람이 아닌 거였어.

계획을 세우고, 해야만 하는 것과 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들을 따르며, 도전하고, 이루어내고, 쟁취하여 전리품 같은 나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엔  백약이 무효한 지병을 앓는 인간이었던 거야.

아무리 애써도 개발이 힘들던 나의 '낙후 지역落後地域'을 이젠 스스로 '그린벨트'로 정해버렸어.

'타고난 나'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의 난개발 대신 푸르른 녹지로 남겨두기로!

내가 지킨 나의 숲에선 새가 날고 작은 시내가 흐르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만든 알록달록한 꽃밭이 있어.

내가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이야기꽃을 심어 준 나의 꽃밭은 날이 갈수록 풍성해져!

은은한 들꽃부터 존재감을 과시하는 화려한 꽃이 있고, 버팀목같이 밑동이 실한 나무들도 늘어나고 있어.

꽃밭에서 나는 어느 시절보다 유연하고 섬세하게 살아가.

오늘도 나는 에쿠니 가오리로 만든 꽃을 또 한 포기 심으며 미세한 전율 같은 행복을 느껴.

고양이 같은 매일과 보폭이 작은 나의 삶, '리타르단도'ritardando 같은 나의 속도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

나는 점점 '아드 리비툼'ad libitum의 속도로 살아갈 자신감마저 생겨.


그러니 나의 '자기 개발서'는 결국 '에쿠니 가오리'인 거지!




*아드 리비툼'ad libitum (라틴어)

음악 악보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라는 말. 연주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표시로, 기본적인 속도를 변화시켜 연주하거나 어떤 성부나 악기의 파트를 추가 또는 생략할 수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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