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가을, 책들

books, quotes, and comments

by muzi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디플롯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 실수 때문에 어떤 고독이 거듭되죠. 후대의 자손들도 선조와 비슷한 고독을 겪고요. 그러나 저의 판타지에서는 고독보다 재주가 더욱 커다랗게 반복됩니다. 마술같은 재주와 귀신같은 솜씨로 우리는 몇 대를 횡단하며 연결됩니다. 엄마와 엄마의 아빠와 그 아빠의 엄마를 동시에 품은 채로 노래를 하고 글을 쓰면서 저는 무언가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실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온 느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 p. 72


부러운 환경과 삶이지만, 내가 그 속에 있었다 한들 이렇게 멋질 수 있을까 싶은,

21세기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20세기 인간인 나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책 제목이 반어법인가 싶었지만 강조법임!

분노 설계자들

터바이어스 로즈-스톡웰 (홍선영 옮김). 시공사

민주주의는 좋은 정보에 의존하는 협력 게임이다. 미디어는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하고 야심적인 정당이 정직함을 유지하도록 살피는 심판 역할을 한다. 새로운 기술이 배포되면서 미디어의 기능이 약해지면 대중의 입장에서는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와 관련해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가 갑자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것이 협력의 함정이다.
민주주의의 적이 반드시 야심에 찬 소란한 남자라고 할 수는 없다. 진정한 적은 혼란이다. 혼란 자체로 인해 구성원은 실제 선동가가 누구인지 헤아리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 스티브 배넌은 정치 전략에 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적은 미디어다. 미디어를 다루는 방법은 그곳을 개똥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pp. 462-3


한 장이 짧은 토막으로, 전체 30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산만한 느낌이다. 작가의 야심은 전해지지만 논점이 자꾸 이리저리 흩어진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문학동네

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p. 8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p. 85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p. 232


기대는 감동을 갉아먹는다. 그래도 좋다. 김애란이니까.


현대사상 입문

지바 마사야 (김상운 옮김). arte

현대사상을 배우면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단순화할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을 전보다 '높은 해상도'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p. 12
세계는 수수께끼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계는 산재하는 문제의 장입니다. ... 세계는 근대적 유한성에서 보았을 때와는 상이한, 다른 종류의 수수께끼를 획득합니다. 우리를 어둠 속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수수께끼가 아닌, 밝고 맑은 하늘의 수수께끼, 맑기 때문에 수수께끼입니다. pp. 212-3


구조주의란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기임을 보여주는 방법.

포스트구조주의란 사람은, 삶은, 그리고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는 다채롭게 창의적으로 어려운 방법.


일인칭 가난

안온. 마티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 p. 10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 중독, 여성의 경력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p. 116


저자가 작가여서 참 다행이다. 그러니까 안온이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인간과 공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것인가

스튜어트 러셀 (이한음 옮김). 김영사


인간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컴퓨터도 만들고, 원자 폭탄도 만들고, 비행기도 우주선도 만들었으며, 달에도 간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은 아직 일반 지능을 갖진 못했을지라도 개별 지능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다. 이런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서로 협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위와 같은 종류의 어마어마한 두려움들에 대해 저자는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한다. 가장 많이 팔린 인공지능 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한 러셀은 이 분야 권위자로서 기술의 한계에 대해 “정확히 알자”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지혜롭고 인자한 할아버지가 삶의 풍파에 힘들어하는 손주에게 현실적이고 따뜻한 조언을 해주는 느낌이다. 경험 많고 나이 많은 전문가의 관점에는 통찰이 담겨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낙관적이고 따뜻한 애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적, 인문사회학적 레퍼런스도 많다.


나눌 파이가 본질적으로 무한하다면, 더 큰 몫을 차지하겠다고 남들과 다투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 AI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는 얼마간 한계가 있다. ... 자존심이라는 파이도 유한하다. ... 따라서 우리 문화는 지각된 자존감의 핵심 요소인 자존심과 질투심의 무게를 서서히 줄여야 할 것이다. p. 153


단점이라면 책을 읽어갈수록 기술적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저자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을까란 궁금증도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챗지피티 등장 이전에 쓰였다. 할아버지 말씀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에게 모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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