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노라
자본가의 기분은 노동자들의 삶을 요동치게 만든다.
애니는 스트립 클럽에서 일한다. 부지런히 손님 받으며 팁을 뽑아내는 데는 나름 도가 텄다. 그러나 세상에 어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먹고살 수 있던가. 매니저는 밥 먹고 있는데 일하라고 재촉하질 않나, 직장 동료 빨강머리 다이아몬드는 틈만 나면 시비를 걸질 않나, 잘하지도 못하고 하기도 싫은 러시아어를 시키는 고객이 있질 않나. 그래도 밥 먹을 때 일 시키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다이아몬드의 도발은 뭐 얼마든지 되받아칠 수 있다. 물론 팁을 많이 주면 러시아어도 해줄 수 있다. 돈 많은 호구를 만나 일확천금을 꿈꾼다거나, 진짜로 만난 어린 부자 고객을 붙잡고 어떻게 해보겠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야심 같은 건 없었다. 나를 원하는 동안 최대한의 수익을 내면 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순수했고 진심이었다.
물론 행운은 애니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재벌 집 막내아들 반야의 순수함은 애니의 삶을 손바닥 뒤집듯 일상에서 천국으로 그리고 다시 지옥으로 떨어트린다. 반야의 순수한 욕정은 한 노동자에게 주급 1만 5천 불이란 천국을, 순진한 반항심은 결혼이라는 환상을, 그리고 반항의 대가를 맞닥뜨린 순간의 순전한 공포는 지옥을 선사한다.
잠시 신경을 안 썼다고 그새 사고를 친 반야 때문에 반야네 집 집사인 토레스와 그의 부하들은 개고생을 한다. 잘리지 않는 것은 물론 후환이 없으려면 반드시 주어진 임무를 해내야 한다. 부하이자 동생인 가닉이 다치고 아파도 짜증만 날 뿐이다. 터프가이 이고르는 시키는 대로 힘만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필 막무가내 젊은 여자를 제압해야 하니 이것 참 곤란하다.
재벌 집 막내아들의 순수한 변덕으로 애니와, 토레스와 가닉, 이고르의 삶은 요동친다. 덧붙여 너그러운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사탕 가게가 박살나고, 이제 일을 시작한 지 2주 된 견인차 운전자는 해고 위기에 처하며, 한 아이의 세례식이 망쳐진다.
물론 재벌이라고 해서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자식은 늘상 하던 대로 놀고 마시고 약하고 싶은데 아버지 회사에 취직하라니 심란하기 짝이 없고, 그 부모는 사고 치고 다니는 자식 때문에 골치 아프다. 세상을 원하는 대로 돌아가게 하는 일도 참 피곤하다. 피곤한 이들에게 노동자의 진심은 '코미디'가 된다. 가닉과 토레스가 고마움을 표현하고 이고르가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진다.
피곤한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진심은 '코미디'
그럼에도 이 와중에 연민과 공감이 피어나고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물론 모든 새싹이 다 잘 자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과연 애니가 아노라로 성장할 수 있을지.
내게 아노라는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에 관한 영화였다. 그리고 그 고단함의 근원에는 자본가들의 심기에 기반한 손가락 튕김 같은 판단과 결정들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