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오스터 장편 소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화자인 바움가트너와 10년 전 세상을 떠난 부인 애나, 애인 주디스, 바움가트너의 아버지 제이컵과 어머니 루스, 애나의 첫사랑 프랭키 등, 등장하는 인물 모두의 삶을 생생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바움가트너의 생각 속에서 잠깐씩 드러날 뿐임에도 그들의 삶 전체를 나도 함께 경험한 듯 느껴진다. 아주 기다란 이야기를 들었는데 시간은 거의 지나있지 않은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이다. 하늘나라에 간 바움가트너(폴 오스터)가 수정 구슬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한 사람의 삶이 주변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들과 꿰어져 있음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깨닫게 해 준다.
우편배달부 몰리, 도우미 아줌마 플로레스 부인과 건축 일을 하는 남편, 그리고 계량기 검침원 에드도 바움가트너의 눈동자라는 렌즈를 통해 바로 내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머나먼 도시에서 만난 타국의 사람들과 그들에게 들은 과거의 사람들, 지하철에서 잠시 스친 소년과 아버지의 삶까지도, 찰나지만 영원이 담긴 모습을 본 것 같은, 시간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계량기 검침원 에드는 그리스계 성인 파파도폴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뻘보다 나이가 많을 바움가트너도 아버지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 시모어(first name) 티컴세(middle name)를 죽도록 싫어하여 초등학교 선생님까지만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재밌게도, 에드를 경계하던 바움가트너는 에드의 이름 불평에 마음이 열린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세대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된 것이다. 바움가트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를 이해했지만, 에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정원사 일을 하기 위해 아버지와 타협한다. 젊은 에드와 아버지의 관계는 바움가트너와 아버지의 관계와는 다른 것이다. 바움가트너의 뜻이 정원사라고 하니 에드는 바움가트너의 젊은 버전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바움가트너는 젊은 대학원생 베브 코언을 끝내 만나지 못한다. 애나의 미발표 작품이 궁금해 방문할 예정인 베브에게 애나의 작품이나 삶을 전달하지 못한다. 이제 코언은 바움가트너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애나가 남긴 것들을 평가할 것이다. 작가 폴 오스터가 동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젊은 세대의 위험해 보이는 선택을 걱정하지 말고(멀리서 운전하고 오겠다는 코언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하지 말고, 그들이 알아서 하게 두자고.
바움가트너는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곳,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 만난 시인에게 들은 이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폴란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우크라이나, 폴란드, 소비에트, 독일, 소비에트의 통치를 거치고 현재는 다시 우크라이나의 도시가 된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 들은 이리떼에 관한 이야기다. 바움가트너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 중에 이 시인만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도 상징적이다.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게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 확실치 않을 때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시인이 나에게 한 이야기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정보의 부재 속에서, 나는 시인을 믿는 쪽을 선택한다. 그곳에 이리가 있었건 없었건, 나는 이리를 믿는 쪽을 선택한다.
바움가트너는 진실이라 믿는 이야기가 진실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확인에 실패했지만 이리 이야기를 믿기까지의 과정, 믿음이라는 선택을 하기까지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를 들여다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