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1)를 읽고
10여 년 전, 모 스포츠 브랜드에서 주최한 10km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차가 아닌 두 발로 마포대교와 강변북로를 달리던 순간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첫 완주 후,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 틈나는 대로 단거리 달리기 대회에 나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로는 대규모 스포츠 행사가 전면 금지되어 더는 참여할 수 없었다.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서울 시내를 달렸던 추억 때문일까. 책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의 표지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푸른 여름 호수를 배경으로,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가는 청춘들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 디자인이 무척이나 싱그러워 보였다.
미우라 시온의 장편소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일본의 인기 스포츠 대회인 ‘하코네 역전 경주’를 소재로 삼았다. 역전 경주는 여러 선수가 장거리를 이어 달리는 기록경기로, 도쿄 하코네 왕복 대학교 역전 경주 대회(이하 하코네 역전 경주)는 한 대학에서 출전한 열 명의 선수가 총 217.1km에 달하는 열 개의 코스를 완주하는 대회다. 이 경기는 올해로 102회를 맞았고, 매년 1월 2일부터 3일까지 이틀간 열리는 대회 중계 시청률이 30%를 웃돌만큼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이토록 유서 깊은 대회에 첫 출전한 간세이 대학생들의 도전기를 담았다. 신입생인 가케루는 타고난 육상 천재지만 불미스러운 사고로 육상계를 떠났고, 4학년인 하이지는 심한 부상으로 달리기의 꿈을 접은 상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치쿠세이소 하숙집에 모인 열 명의 남학생은 하이지의 인생 목표인 하코네 역전 경주를 준비하게 된다.
※ 아래 글에는 책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오합지졸 선수들이 고된 훈련을 통해 능력을 쌓고, 숙적인 라이벌 집단을 극적으로 제압하며, 목표한 성과를 이루고 성장해 나간다는 전형적인 스포츠 장르의 서사를 따른다. 이토록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2007년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또한 영화, 애니메이션,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각색될 만큼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바람이 강 하게 불고 있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힘은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과 생생한 묘사, 그리고 역전 경주 특유의 매력에서 나온다.
하코네 역전 경주는 선수 열 명이 전 코스를 완주해야 하기에 팀워크와 전략이 중요한 단체 경기지만, 이와 동시에 한 명의 선수가 자신이 맡은 코스를 오롯이 책임지는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책의 약 40%를 할애해 이틀간 열리는 이 대회를 자세히 묘사한다. 특히 개별 코스를 달리는 선수들의 속마음과 경기 상황을 교차해 보여주는 문장들은 읽는 이에게 마치 선수들과 함께 달리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무사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유학생이지만 육상대회 출전은 처음이다. 그는 하코네의 꽃이라 불리는 제2코스를 맡아 달리며 언제나 외지인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본다. "무사는 기뻤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자기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고 평등한 자리에 서 있다."(p.356) 그는 달리기와 동료들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둘러쌌던 편견과 외로움을 극복한다.
또한 니코짱은 고등학생 때까지는 육상 선수로 활약했지만, 점차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굵고 무거운 체형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고통받았다. 이후 그는 육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큰 좌절을 겪고, 결국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개인적으로 니코짱의 사연에 가장 공감이 갔다. 니코짱처럼 나도 늘 운동을 좋아했지만, 부실한 운동 신경 탓에 어떤 종목이건 실력이 쉽게 늘지 않았다. 한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보다 빠르게 달리거나 헤엄칠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거나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다시 운동이 주는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니코짱 역시 하코네 역전 경주에 도전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달리기를 향한 진심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하코네 제7코스를 분투해 달리며 그간 쌓아온 육상에 대한 상념과 회한을 털어낸다.
"선택받지 않았어도 달리기를 사랑할 수는 있다. 달리기라는 행위가 내포하는 고독과 자유처럼 참을 수 없이 좋아한다고 느끼는 마음만큼은 니코짱 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p.472)
한편 소설의 제목인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팀의 리더인 하이지가 장거리 달리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그는 팀원들에게 빠른 선수가 아닌 강한 선수가 되기를 주문한다. “빠르기만으로는 긴 거리를 끝까지 이겨낼 수 없어. (중략) 장거리를 뛰려면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힘든 국면에서도 끈질기게 몸을 계속 움직여 앞으로 나가야 해. 장거리 선수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인함이다.”(p.171)
이 같은 하이지의 철학은 과거 강압적인 훈련과 규율에 고통받던 가케루의 마음을 움직인다. 늘 기록과 순위에만 집착하던 가케루는 제9구간을 뛰며 진정한 강함의 의미와 팀원들과 나눈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달리기는 힘이다. 속도가 아니라 혼자이면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강함이다. 하이지 형이 그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중략)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서 달리기라는 외로운 행위를 통해 한순간만큼은 서로 하나가 되고 이어지는 기쁨을 말이다.”(p.505)
작가인 미우라 시온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화려한 승리를 거머쥐지 않더라도,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자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책 속에서 작가는 제4구간을 달리는 조지의 마음을 빌려 말한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하코네가 아니다. 달리기를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좀 더 멀고 깊고 아름다운 곳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그곳을 보고 싶다."
(p.393)
간세이 대학은 하코네 역전 경주에서 우승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대회를 통해 삶을 살아갈 강인함을 배웠고, 하코네를 넘어 각자의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우리에게는 예측하기 힘든 긴 장거리 전체를 견뎌낼 ‘강인함’이 필요하다. 언젠가 인생의 목표에 도달할 모든 이들에게, 특히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볍게 달리거나 달리기 대회에 출전해 보기를 추천한다. '백각이 불여일행(百覺而 不如一行)'이라는 말처럼, 직접 지면을 달리며 피부에 닿는 ‘강한 바람’을 맞아보기 바란다.
1) 미우라 시온,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임희선 옮김, 청미래,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