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 매들린 밀러의 책 『아킬레우스의 노래』1)와 『키르케』2)를 읽고

by 다라미


2011년, 매들린 밀러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를 재해석한 첫 장편소설 『아킬레우 스의 노래』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인정받았다. 이후 작가는 2020년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마녀 키르 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키르케』를 써냈고, 이 작품 역시 전 세계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두 소설은 저자의 재해석을 거쳤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충실하게 원전을 따른다. 즉,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두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 리와 결말을 파악한 상태로 책을 접하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들은 뛰어난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책의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인도한다. 특히 후속작인 『키르케』는 최근 드라마 제작이 확정될 만큼 서사와 주인공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왜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를 이토록 흥미롭게 읽게 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지닌 평범하지만 특별한 자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했던 기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역들 대다수는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올림포스의 신들과 그들이 아꼈던 위대한 영웅들이다. 반면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주인공은 비교적 평범한 인간인 파트로클로스이며, 『키르케』의 주연은 하급 신인 님프 키르케다. 이들은 그간 우리가 접했던 신화 속 주인공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파트로클로스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지극히 평범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멸시 당하고, 연인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에게도 미움받는다. 또한 키르케는 여신이지만 못생긴 외모와 보잘것없는 신성을 이유로 조롱당하고, 결국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외딴섬으로 쫓겨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해온 신화 속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일상은 비현실적인 신과 영웅보다는 평범한 인간의 행적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마치 우리들처럼 쉽게 상처받고 고통받는 파트로클로스와 키르케의 인간적인 모습에 더 쉽게 공감하게 된다. 또한 파트로클로스와 키르케는 언제나 약자를 향한 연민을 느낄 줄 알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 이러한 그들의 성품은 오랫동안 서사시의 중심에 자리했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가 가지지 못했던 것이기도 하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진실한 마음과 애정을 눈치채고 그를 동무이자 연인으로 맞이한다. 영웅들이 난무하는 트로이 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는 화려한 무공을 세운 전사는 아니었다. 대신 그는 동료들을 치료하며 그들의 이름과 가족들을 기억해 주고, 포로로 끌려온 여인들을 위해 기꺼이 막사를 내어준다. 전쟁 중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불화와 자신의 명예를 이유로 동포들의 죽음을 외면하자, 파트로클로스는 사랑하는 연인 을 대신해 그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희생은 결국 트로이 전쟁의 끝을 앞당겨 무고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는데 일조한다.


인간인 파트로클로스와는 달리 키르케는 영생이 보장된 신이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가족들의 무자비한 괴롭힘과 주변 신들의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느 날, 키르케는 자신의 삼촌뻘인 프로메테우스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말을 듣게 된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p.34)


이후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얻고, 우연히 마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키르케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인도 아이아이에로 유배당한다.


이후 키르케는 섬을 찾아온 다양한 인간들에게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지만, 되돌아오는것 은 호의를 무시한 폭력과 고통뿐이었다. 이에 그녀는 절망하는 대신 자신을 괴롭혀온 세상에 대항할 마법의 힘을 기른다. 그녀의 동생들이 마법을 이용해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과 달리, 키르케는 마법을 통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약자들을 돕고자 노력한다.


점차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인 헬리오스와 아테나 여신의 부당한 처사에도 굳건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 한 힘을 지닌 마녀로 성장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키르케는 자신이 만든 식인 바다 괴물인 스킬라를 물리치고, 무고한 인간들의 희생을 치르게 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신으로서 주어진 영생을 포기하고, 연인과 함께 늙어가는 주체적인 인간의 삶을 선택한다.


한편 이 책들의 서술상 특징은 두 주인공이 소설의 화자로 등장해 섬세하지만 담담한 독백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파트로클로스는 “내 안에서 연민 비슷한 것이 차오르자 화끈거리던 뺨이 가라앉았다. 무관심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기억이 났다.”(p.187), “내 쪽은 쳐다보지 않았는데도 무서웠다. 그녀가 등장하면 어디든 온갖 흉조 와 성난 신과 천 가지의 엄청난 위기가 함께 들이닥쳤다.”(p.335)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가식이나 과장 없이 전달한다.


"나는 혼자인 게 어떤 건지 알았다.
남의 행운이 막대처럼 나를 찌르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p.172)


『키르케』 역시 주인공인 키르케가 기억을 더듬어 읊조리는 듯한 문장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질문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내가 제대로 된 딸이었다면 그가 물어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p.32), “환희가 내 목젖에서 꿀처럼 터졌다. 그래도 나는 전과 다름없는 표정을 유지했다.”(p.273). 이러한 책의 문장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자세히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키르케』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가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고전을 새롭게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고전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들이 지 배하는 세상 속 영웅들의 잔혹하고 처절한 분투를 노래한다. 이를 통해 호메로스는 결국 인간 은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인생은 비극적인 전쟁과도 같다는 점을 우리에게 끊임없 이 상기시킨다.


하지만 두 서사시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인간에게 그토록 잔인한 삶을 이어가게 했던 원동력은 명예도, 권력도 아닌 소중한 이들과의 사랑에서 비롯됨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보여준다. 이러한 교훈은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는 전쟁에 가려져있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시대를 초월한 우정과 사랑으로, 『키르케』는 주어진 운명과 질서를 거스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 여신의 성장으로 새롭게 쓰인다. 특히 두 주인공이 지닌 애정과 타인을 향한 연민이 신화 속에서 숭배해온 강한 힘과 아름다운 외모보다 더 귀중한 것임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운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키르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접한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즐거움을 제공하고, 아직 고전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는 원전을 접할 계기를 만들어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관심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1) 매들린 밀러, 『아킬레우스의 노래』, 이은선 옮김, 이봄, 2018.

2) 매들린 밀러, 『키르케』, 이은선 옮김, 이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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