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님 Jun 26. 2022

원두를 직접 갈아 핸드드립 한 커피

지극히 사소한 나의 일상 #1

  조심스럽게 밀봉되어 있던 커피 원두가 담긴 봉투를 열면 훅 하고 밀려오는 커피 향에 발가락 끝까지 짜릿하다.


  커다란 나무 스푼을 다글다글한 원두 틈 속에 밀어 넣고 저으면 그 소리가 ‘스윽스윽’ 하기도 하고 ‘달그락달그락’ 하기도 한다. 스푼 가득히 들어 올린 원두는 다시 수동 커피 원두 분쇄기의 작은 상자 속으로 쏟는다. 같은 동작을 몇 차례 반복하여 작은 상자 속을 최대한 가득 채운다. 그리고 분쇄기의 뚜껑을 닫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린다.


  ‘드르륵드르륵’ 하고 커피 원두가 부서지며 뿜어내는 향은 원두 그 자체로서의 향보다 한 층 더 깊다. 나는 복식호흡을 하듯 크게 숨을 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아무 생각 없이 분쇄기의 손잡이를 한 방향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창문 앞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는 가벼운 노동과 그 여백 속으로 녹아드는 진한 커피 향. 전 날 흑백으로 잠들었던 나를 총 천연색으로 다시 살려내는 커피 원두 분쇄의 마법.


  이왕이면 그릇장의 맨 윗 칸에 모셔만 두었던 파스텔 빛깔의 올록볼록한 커피잔을 꺼내본다. 또는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의 해외 지점에서 공수해 온, 여봐란 듯 전시해두기만 했던 지역 한정판 머그잔도 좋다. 참, 그전에 전기 포트에 생수를 붓고 물을 끓인다. 밥을 짓거나 육수를 내기 위하여 끓이는 물은 수돗물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 집의 룰이지만, 커피만큼은 반드시 생수를 끓여 사용하는 것 또한 룰이다. 일말의 부정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신성한 의식이랄까.


  생수가 전기 포트 안에서 바글바글 끓기 시작한다.


  커피 필터를 한 장 꺼내어 봉합된 모서리 두 곳을 손 끝으로 반듯하게 접은 후에 드리퍼 안에 끼운다. 잔 위에 필터를 끼운 드리퍼를 올리고 나면 비로소 곱게 갈린 커피 가루를 분쇄기에서 꺼낼 차례다. 먼저 잔과 드리퍼를 따뜻한에 물로 한 번 데우는 것이 좋다고도 하던데, 나는 별 이유 없이 이 과정을 생략해버린다.


  질 좋은 배양토 같은 커피 가루가 드리퍼 안의 필터 위로 소복하게 쌓인다. 손바닥으로 그 옆을 가볍게 탁탁 치면 표면이 지평선처럼 반듯해진다. 막 끓인 생수는 주둥이가 백조처럼 길고 우아하게 휘어진 드립 포트로 이미 옮겨 두었다. 그리고 드리퍼의 약 한 뼘 위에서 시작되는 뜨거운 낙수.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는 커피 원두 빵과 본격적으로 온 집 안을 휘젓기 시작하는 진한 커피 향.


  이제 곧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완성될 것이다.


질 좋은 배양토 같은 커피 가루가 드리퍼 안의 필터 위로 소복하게 쌓인다.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때이다. 기말고사가 시작된 초여름, 밤늦게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다가 지치고 졸리면 건물 끝의 자판기에서 달콤한 믹스 커피를 뽑아 마셨다. 커피 자판기 옆의 스탠리스 쓰레기 통에는 지저분한 담배꽁초가 수북이 처박혀 있었다.  옆에 탑처럼 쌓아 올린 종이컵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휴게실에서   마주치던 고학번 선배들은 내가  년의 휴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마주쳤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르지 않는  같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직원이   명도 되지 않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직접 맥심 커피를 타서 마셨다. 사장님,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의 순으로  드린 후에  것과 경리 언니의 것을 탔다.  마시고 나면 컵을 닦았다. 역시 사장님,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의 컵과 함께  컵과 경리 언니의 컵을 닦았다. 중요한 손님이 오시면 철제 캐비닛 안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커피잔과 받침을 꺼내어 똑같은 맥심 커피를 타서 드렸다.  번은 손님의 방문이 길어져서 꽃무늬 커피잔을 닦지 않고 먼저 퇴근했는데,  일로 다음날 사장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귀한 꽃무늬 커피잔을 사장님 이하 모두에게 들으라는  와장창 소리가 나도록 개수대에 던져 넣은 것은 엄연히  잘못이다.  외에도  가지 건방진 사건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나는 결국 입사  개월 만에  회사에서 잘렸다. 이제는 어느 회사를 가도 맏언니 뻘이 되어 버린 내가 어린 동료들에게 들려주는 ‘ 때에는 말이야시리즈  가장 인기 있는 에피소드이다.   

   번째 회사에서 드디어  승진을 했을 무렵부터는 카페라테를 즐겨 마셨다. 카페라테를 내게 처음 권했던 팀장님은 항상 출근길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잔을  와서 오전 내내 마셨다. 그리고  마신 일회용 컵은 모니터의 왼편에 쌓아 두었다. 두어 달쯤 지나면 그렇게 쌓인 컵이 첨탑을 이루어 천장에 닿을   듯했다. 그러면 팀장님은 첨탑을 무너뜨려 종이백에 쓸어 담아 가지고 나가서는   원인가로 바꿔오셨다. ( 당시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에서는  마신 일회용 컵을 가지고 오면 오십 원을 반환해주었다.) 그리고 비워진 팀장님의 모니터 왼편에는 바로 이튿날부터 다시 새로운 첨탑 쌓이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회사의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고,  역시 직속 상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팀장님을 살살 피했다. 그래서인지 팀장님이 회사를 떠난 뒤의 소식은 지금까지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  사람 사정없이 들이밀며 친구 맺기를 강권하는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조차 찾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나와 팀장님 사이에 남아있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가끔 커피 전문점에서 카페라테를 주문할 때면 자연스럽게 팀장님이 떠오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고작 갓 서른을 넘겼을 뿐이었던, 역시   어리고 나만큼이나 사회생활에 서툴렀던  언니.

  카페라테에서 아메리카노로 취향이 변하게  계기는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취향의 변화와 함께 나이를 제법 먹었다는 , 그리고 그만큼 사회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대리라는  직함을 달기까지 회사를  번이나 옮기며 어렵사리 어른이 되었던 나는 당초 주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아니,  다녔었다. 불과  개월 전에 나는 다시 한번 사표를 던지고 빠르게 증가하는 사십 대의 실직자 무리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니까.


  자판기 커피와 맥심 커피는 달콤하다. 카페라테는 우유가 주는 풍미로 부드럽다. 반면 아메리카노는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씁쓸하다.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순전히 멋으로 그런  알았고, 아마  역시 멋으로 마시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원두의 산지와 로스팅 정도를 따지고 직접 핸드드립을 할 정도로 빠져버렸으니, 사람 일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아메리카노는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씁쓸하다.


  솜씨 좋게 내려진 커피가 예쁜 잔 안에 가득하다.


  나는 이 커피 잔을 고상하게 받쳐 들고 식탁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켤 것이다. 이력서를 올려둔 몇몇 구직 사이트를 한 번 둘러보고, 정중한 채용 탈락 이메일도 확인할 것이다. 지난번에 점찍어둔 채용 전형이 아직 유효한지도 확인해보고, 조건만 맞다면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끌어모아 다시 한번 지원해 볼 것이다.


  
비록 씁쓸하지만 따뜻하고 향긋한 핸드드립 커피 두어 모금이면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이겨내  것이다(2020년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