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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Jan 27. 2023

사람, 좋아하세요?

제작 PD로 살아남기 9 : 사람에 치이고, 사람에 위로받고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일들은 모두 ‘사람’이 만들어간다. 사람 덕분에 일이 되고, 사람 덕분에 일이 해결되며, 때론 사람 ’때문에‘ 일이 틀어지기도, 일이 망가지기도 한다. 일이 일을 데리고 다닌다기보다는, 사람이 ’일‘을 만들어내고 일을 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드라마 현장에서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으면 일이 생기기 마련이며, 일을 해결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그런 일을 조금 더 쉽게 만들어가는 것도 제작 PD의 ‘사람을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룬다’고 하면 으레 영악한 사람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아부를 하거나, 맘에도 없는 가식을 떤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공포감을 주거나 으름장을 놓아서 사람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말 역시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특성도, 성격도, 배경 지식도, 생각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카멜레온처럼 거기에 맞춰서 ‘일이 되게’ 만들어 가는 게, ‘사람을 다룬다’고 하는 것 같다. 


단순히 계약을 잘 따내기 위한, 혹은 눈앞의 비용을 깎기 위한 것에만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제작 PD의 기본적인 제1의 관리영역은 ‘돈’이 맞다. 하지만 눈에 바로 보이는 돈 때문에 사람을 다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것이 또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저 사람의 비위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사람을 다룬다고 하면 그것만큼 일을 하며 자존감도 떨어지며 슬픈 것이 또 있을까. 그렇게 되면 매일 사람 때문에 화가 나고, 사람 때문에 슬프고, 사람 때문에 온갖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현장에 출근하기 싫어지고 (어느 직장인이건 마찬가지겠지만), 현장에 도착하면 ‘나 빼고 다 망했으면’하는 생각에 하루가 지옥 같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지만서도, 결국 사람이 싫어지는 최악의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다.


제작 PD의 ‘사람을 다루는’ 영역은 그것보단 한 발 앞서 나아가야 할 듯하다.

그냥 일종의 ‘배려하는’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아니 제가 배려하면 뭐 하나요? 옆에서 신경 긁고 일부러 못 되게 하는데. 그냥 제작 PD가 호구처럼 참고 배려하라는 건가요? “


그런 뜻은 절대 아니다. 그쪽에서 신경을 긁고 못 되게 군다면 그 사람의 인성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에 그것까지 참고 배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사람한텐 당당하게 대해도 된다. 하지만 같이 소위 ‘싸가지가 없어지면(!)’ 안 된다. 싸가지 있게 당당하게 굴면 된다. 그마저도 사실 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배려를 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다. 즉, 나보다 아래인 (혹은 약자인) 사람에게 갖는, 강자만이 갖는 여유인 것이다. 여유 있는 사람이 남도 배려하고, 그들이 뭐라 하건 여유 있게 받아주고, 받아칠 수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가끔 가슴 한편에는 그들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진심으로 올라오곤 한다. 사람에 대한 여유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을 먹고서는, 나조차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모든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현장에서 먹기란 사실 쉽지 않다. 고된 일정에 체력도 떨어지고 피곤함도 쌓여가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한 번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드라마 현장에서는 더욱 긴장을 하고 촬영에 임하다 보니 예민해져 가는 나의 신경을 나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다. 하지만 결국 드라마를 같이 만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실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물론 그 사이에는 그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악한’ 사람이 종종 껴 있다. 어린 나이에는 사람 보는 눈도 없고, 일을 하며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그런 사람들의 의도도 ‘흐린 눈’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때론 물리적인 피해도 입기도 했다. 인생의 수업료를 비싸게 치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굳이 그런 사람들까지 모두 품을 필요는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나에게 피해가 되어 돌아온다. 굳이 나 자신을 피해 입히면서까지 배려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거든 조용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자.)




날이 추웠던 어느 날이었다.

주인공이 기타를 쳐야 하는 씬인데, 주인공이 기타를 연습하긴 했으나 능숙하지 못해, 기타 대역을 현장에 두어 같이 옆에서 연주를 하며 찍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감독이 정한 촬영장소는 부산이었기에, 나는 부산에서 기타 대역을 해 줄 사람을 찾았고 인터넷을 통해 한 분을 섭외할 수 있었다. 그분은 열정이 넘치던 분이었고, 내가 볼 땐 순수한 분이었다. 주인공이 어떻게 기타를 치면 좋을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의견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원하던 건 단순한 ‘기타 대역’이었기에, 나는 적당하게 의견을 걸러 배우에게 직접, 또는 조연출을 통해 전달했다.


촬영 당일. 평소보다 따뜻하다는 기상 예보가 있었지만, 어쩐지 그날 찬 바람이 많이 불어 무척 추웠다. 밤씬이었던 터라, 나는 기타 대역 선생님을 4시부터 불러서 배우에게 연습을 시키려고 했는데, 촬영 스케줄이 딜레이 되는 바람에 당초보다 일정이 조금 늦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어떤 불평이나 군소리를 내지 않고, 오히려 계속 괜찮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런 마음이 전해지자 나는 오히려 더 미안해져 갔다. 촬영스팟 근처 카페에서 대기하며 선생님은 계속 기타 연습을 했다. 예상보다 촬영 콜타임이 점점 늦어지자, 불안했던 나는 계속 선생님 옆에서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게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며 시간을 보내며 연출부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촬영을 하겠다며 올라오라는 연출부의 호출에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올라갔다. 촬영이 익숙하지 않은 터라 NG가 몇 번 났는데, 나는 선생님 옆에 붙어서 큐 사인과 컷 사인을 직접 전달했다. 처음에는 사인이 맞지 않아서 엇박이 나는 경우가 좀 있었고, 어디까지 촬영용으로 쳐야 하는지 잘 몰라서 삐걱거리긴 했었는데, 나는 옆에서 감독님의 사인을 전달하며 촬영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2시간 안에 해당 씬은 촬영이 끝났고, 선생님께 다시 한번 기꺼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건넸다. 하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방송 잘 보겠다며 새로운 경험을 해서 즐거웠다고 말하고 현장을 떠났다. 그 뒷모습 위로 부산의 맑은 하늘 속에서 별들이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촬영을 그냥 얼른 마쳤으면 하는 생각에, 혹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선생님을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선생님 옆에서 밀착마크하며 신경 썼던 경험은 내가 사람을 좋아해서이기도 했고 내가 직접 섭외했다는 책임감도 있었지만, 결국 선생님을 배려하는 것이 좋은 퀄리티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 장면은 해당 드라마 회차 말미에 ‘뽀너스 영상’으로 나와, 주인공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줬다. 일이라고 생각해서 했다면 힘들다고 짜증 내면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작 PD를 하고 있는, 혹은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 하나가 있다.


여러분은 사람,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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