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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Feb 03. 2022

고민 말고 일단 리스트

의미 없는 기록이라도


아무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양말 더미처럼 해야 할 일들이 곳곳에 쌓여 있다. 안내문을 파워포인트로 만들고, 심의받아야 할 광고 엑셀 파일을 수정하고, 키워드 비용을 수시로 점검하는 한글파일까지 챙겨야 하는 직장인 내가 있고, 스스로 정해 놓은 책 서평 포스팅과 브런치 에세이 마감이 나란히 기다리는 또 내가 있다. 마치 줄줄이 소시지처럼. 소시지는 맛있기라도 하지, 이 일들은 꾸역꾸역 꼬장꼬장 어깃장을 놓으며 내가 무슨 빚을 진 것처럼 가까스로 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돈을 받든 못 받든 일단 내게 닥쳐온 일은 성실히 해내고야 마는 노예근성 때문에 외면도 못하고 질질 끌려가며 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가 생기면 책부터 들춰보는 습관이 있어 ‘기록’에 관한 여러 책을 훑었다. 그중 선택된 책은 신미경 작가의 <나를 바꾼 기록 생활>이었는데 루틴에 따른 간결한 삶을 지향하고 그 방식을 견고히 해줄 여러 기록에 관한 글이었다. 제일 눈길이 갔던 건 구글의 스프레드시트 이용하여 여러 일을 한다는 점이었는데 업무로만 쓸 줄 알았지 개인적으로 쓸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어서 신선했다.

 

작가님의 스프레드시트 활용법은 실로 무궁무진했다. 저축, 소비, 은행별 적금, 주식, 부동산, 은퇴자금 등을 표로 정리한 ‘돈 모으기’ 챕터부터 일과표(업무) 체크리스트와 커리어 히스토리(이력서) 업데이트, 건강관리와 생활습관까지 탭을 나누어 관리하고 있었다. 완전한 꼼꼼함을 무장하고 우리에게 소개하는 책은 부제조차 <삶의 무게와 불안을 덜어주는 스프레드시트 정리법>이었으니 그 치밀함과 성실성이 생활 모든 영역을 지켜주는 게 당연했다.


무엇보다 이 스프레드시트 기록법에 끌린 건 눈에 잘 들어오는 정리된 표와 그를 완성시키는 선의 모양, 칸의 넓이, 업무를 완료했을 때 내가 원하는 색깔로 표시할 수 있는 점이었다. 뭐랄까, 단정하고 깔끔하게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해보고 싶은 설렘? 나같이 미적 감각 없고 꾸미는 센스 없는 똥 손은 검은색 펜으로 반듯하게 글씨를 쓰는 일이 최선인지라 언제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delete 키 하나로 쓱 지울 수 있는 정리법이 꽤 마음에 들었다.


역시, 이럴 때 회사에 다녀서 참 다행이다. 나의 노트북에 없는 프로그램을 돈 안 내고 쓸 수 있는 것과 내 손에 익숙한 엑셀을 이용해 업무 기록표를 만들어 이면지에 프린트까지 가능한 직장인의 얼마 안 되는 이점!! 두근두근까지했다.


처음 만든 [업무] 파일은 병원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할 일도 배로 늘어났고, 온라인 채널에 맞는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것에 대비한 리스트였다. 블로그 대문 이미지를 변경하는 것부터 포스트, 카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까지 각 채널의 특성에 맞는 페이지를 각기 만들어야 하고 메인 카피와 서브 카피를 짓는 일도 당연히 나의 업무였다.

사실 ‘일’이라는 건 사람이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감 시간을 두고 오지만 그 일이 사방에서 물밀듯 한꺼번에 들어오면 나도 일도 둘 다 정신을 못 차리고 꼭 한두 개씩 빼먹는 상황이 생긴다. 내 기준에선 지극히 작은 일인데 이게 또 안 될라치면 큰 일처럼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 게 문제여서 애초에 실수하지 않도록 잘 챙기는 것이 직장인의 기본 스킬이다.

이럴 때 리스트가 꽤 요긴하다.


게다가 “그거 언제까지 될까요?”라고 묻는 말은 (지금 당장 해주세요!)라는 뜻이고, “내일까지 해드릴게요.”라는 말은 (내일 퇴근 시간 직전까지 한번 맞춰볼게요.)라는 뉘앙스인 걸 우리는 다 알지 않은가? 그러니 서로 짜고 치는 회사의 고스톱 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빨리 해치우고 치고 빠지는 게 제일]이란 말씀!! 그것을 돕는덴 쭉쭉 나열된 나의 TO DO LIST가 있다.



원래 계획을 하고 지키는 일에 큰 흥미가 없던 나는 작년 1월부터 엑셀을 이용한 여러 업무 리스트를 기록하는 일에 빠져 지냈다. 병원 인증, 종합병원 발표, 하다못해 병원 모니터 A/S 계획과 교체까지 모든 걸 엑셀 파일에 기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서를 정하고 그 열에 맞춰 리스트를 셋업해 날짜를 적어 동그라미로 마감을 표시하는 성취감응 차곡차곡 쌓았다. 원하는 색깔로 그러데이션을 넣어 표를 예쁘게 꾸미는 일도 재밌었고 졸린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정리를 해두니 특별히 시간을 내야 할 귀찮음도 없었다. 오히려 잠도 깨고 수시로 나무와 숲 - 업무 전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질서 없는 무형의 일을 처리한 다음 볼펜을 직직 그어 지우는 기쁨도 컸다. 내 일을 통제하고 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리스트를 짜는 건가? 처음엔 놓치는 업무 실수를 줄이고 빈틈없이 시간을 써보려 시작한 일이 1년 정도 하다 보니 어느덧 다이어리 기록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다꾸의 세계에 한번 빠져본 사람은 안다. 실로 그곳은 굉장한 곳이란 걸. 굴러다니는 신문지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다정한 세계. 경계 없는 상상력을 과감히 펼칠 수 있는 곳임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독히도 선을 넘지 않는 녀석이어서 날짜를 쓰고 할 일을 적으면 더할 게 없었다. 다이어리 표지를 꾸민다거나 색색의 스티커를 이용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다꾸도 영상을 보며 배워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왕 30대에 다시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색이 예쁜 인덱스와 스티커를 마음껏 활용해 보기로 했다. 별 볼 일 없는 칙칙한 내 생활이 종이 위에서까지 무채색인 건 싫었으니까. 기껏해야 3개의 형광펜을 적절히 섞어가며 위클리를 꾸밀 뿐이지만  취향에 맞는 스티커를 고르고 사는 기쁨이 있고, 또 이게 뭐라도 자잘하게 뭔가를 적고 있으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작은 위로가 되었다.



이제는 잘 안 풀리는 일 때문에 마음이 불안할 때면 TO DO LIST를 펼친다. 머릿속으로 고민과 불만만 가득 키우는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와 함께 손을 움직이며 지금 안 되고 있는 일내가 해볼 수 있는 일을 나란히 적으며 리스트를 짜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명한 해결책이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내가 가진 불안을 적는 행위만으로도 보이지 않은 실체에 한 발 다가 선 기분이다. 원래 불안이란 건 눈에는 안 보이고 머리에서만 안개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 그 답답한 마음을 종이 위에 적어 눈으로 확인해 보면 가까스로 문제에 대한 힌트가 떠오르기도 한다. 뭐 역시 아무 소득이 없을 때도 왕왕 있지만 일단 적고 본다. 언젠가는 버릴 종이니까. 그날이 왔다는 건 되든 안 되든 그 문제는 이제 끝났단 의미일 테니까.


실천보다 고민을, 행동보단 생각이 먼저인 내게 리스트는 불투명한 불안에 ‘동사적 행위’를 더하는 방법이다. 일단 적어 놓으면 눈에 자주 띄고, 계속 보고 있으면 하나씩 지우는 재미가 있어 뭐라도 해보게 된다. 물론 모든 걸 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지 않는다. 그래도 해봤다는 의욕은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존감이고 ‘해봤냐, 아니냐’의 차이는 나의 성장을 가늠하는 KEY 포인트다.

 

그러니 우물쭈물 고민 말고, 아니 고민될 땐 리스트다.  


개인적으로 책 서평과 글 쓰는 채널을 넓히는 데에도 리스트가 유효했다. 워낙 쓰는 시간이 한정적이고 또 스스로 마감 시간을 정해 놓지 않으면 영영 쓰지 못하는 사람인지라 자의적 마감 리스트는 작년에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하게 했고 예스 24에서 마련한 나도 에세이스트 이벤트에 글을 써 가작이란 선물을 받기도 했다. 아마 적지 않았더라면, 머리로만 생각했더라면 나의 글 쓰는 세계를 단 1mm도 넓히지 못했을 것이다.


꼭 목적을 쓰지 않아도 된다. 집에 혼자 있을 아빠에게 보내는 마켓 컬리 반찬 리스트를 끄적이기도 하고 사고 싶지만 살까 말까 고민되는 세일하는 겨울 옷도 쭉 적어 본다. 며칠간 고민만 하던 차에 목록에서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지우면 결국 남을 것들이 남는다.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일이 리스트를 통과하면 단순하게 정리되어 생활이 깔끔해진다. 그러니 혹여라도 지금 나의 주변이 어지럽고 머리와 가슴이 답답한 분들이 계시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리스트부터 짜보시라. 방청소 구역을 침대/옷장/화장대로 나눠봐도 좋고 매일 아침 일어나 마주한 시간을 기록해도 좋다. 쓰다 보면 어디서부턴가 꼬인 실타래가 보이고 그걸 쭉 풀어보면 불안한 나의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보인다. 긴 호흡의 글이 아닌 짧은 단어로 나열된 리스트만으로도 충분히 아주 충분히 나를 지켜줄 수 있다.


그러니 고민 말고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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