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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Nov 24. 2017

살림에도 유니폼이 필요합니다.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이불을 정리합니다. 결혼을 하고 몸에 배려 노력하는 습관 중 하나입니다. 제가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며 정리하고 정돈하는 일은 하루를 시작하는 때에 참 적절한 의식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침구 정리가 끝나면 냄비에 물을 올리고 달걀을 닦아 삶기 시작합니다.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아침 요리의 전부입니다. 가끔 어머님께서 토마토를 가져다주시면 주스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아침에 눈을 반쯤 뜨고 만들기엔 부담스러워 전날 저녁에 만들어 두곤 합니다. 그리고 달걀이 삶아지는 동안 전날 설거지해놓았던 그릇들을 제 자리에 넣고 주방 구석구석도 정리하다 보면 남편의 아침 준비는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시간을 '살림 워밍업' 시간이라 부릅니다. 하루 종일 집 안과 밖을 동동거리며 돌아다니기 위해선 몸을 깨우는 시간이 필요하고 리듬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아침 차림과 설거지로 잠에서 깨고 오늘 하루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우선순위를 정하고 차분하게 시작하는 것은 꽤 신선한 일입니다.


좋아하는 분홍 앞치마


전업주부는 축복받은 직장을 가졌습니다. 복잡한 출근길을 마주할 일 없이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부터 일을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론 직장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일의 활력이 떨어지거나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앞치마를 입습니다. 일종의 유니폼이기도 하죠.

저의 분홍 앞치마를 입는 순간, 집안일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오늘 꼭 해야만 하는 마감일이 있는 것처럼 속도를 내어 세탁기를 돌리고,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고, 서재 책장을 정리합니다. 앞치마에 먼지가 달라붙을수록, 물기 있는 손을 마구 갖다 댈수록 일의 능률은 올라가고 홀가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처음 앞치마를 구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땐 조급한 심정이 있었습니다. 분명 나는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스스로 한량한 백수처럼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비교하며 우울해하고 멋지게 자신의 일을 하는 커리어 여성을 부러워하기만 했습니다.


뭔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전업주부로서 사는 한 계속 이런 생각으로 지낸다면 부부간의 애정에도 틀림없이 균열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집안일을 직장처럼 여길 수 있도록 유니폼을 입자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앞치마라고 여겨질진 모르지만 단순한 의상 체인지만으로 집안일을 대하는 태도가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살림 노동의 겉모습이 예뻐지니 행위가 즐거워지고 나와 가족을 위한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걸어 놓기만 해도 훌륭한 인테리어가 되는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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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효재 인터뷰-채널예스]

알아서.

사람은 누구나 창조의 신. 지혜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다 알아서 해요.

누구나 지금 한 일이 최선이라고 하면서 사는데 세월이 흐르면 최선이었지만 6개월 뒤에는 실수였어도 모든 건 거름이 돼서 성장할 수 있어요. 지금 최선이면 후회하지 않아도 돼요. 사람들이 너무 학문적으로 풀어놓으니까 고달픈 거죠.

난 노동이 즐거워요. 노동 없이 성찰이 될까요?

한번 노동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 봤어요. 절대 성찰할 수 없어요. 오만 잡생각만 떠올라요. 노동의 대가는 엄청나요. 하물며 내 가족을 위해 하는 살림만큼 더 빛나는 일이 어디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 밥 주라는 거 아니잖아요. 내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이게 왜 귀찮을까 싶어요. 얼마나 귀한 일인데요.

"



맘에 드는 앞치마를 구입하고 유니폼으로 입은 행동은 지금까지 열심히 살림과 요리를 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저의 삶을 다양하게 늘려가고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집안 노동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스스로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소파의 먼지를 털어내고 신발장을 쓸며 제가 얼마나 성찰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성장만큼은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가족을 위한 귀한 일을 하는 직업.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은 직업을 가졌나요. 무가치한 게 결코 아닙니다. 몸 편히 지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상사의 쓴소리를 듣고 온 배우자를 위해, 점수로 매겨지는 학교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온 아이에게 집안을 빛내는 사람은 든든한 쉼터입니다. 이런 곳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디도 갈 곳이 없습니다. 그 공간을 닦고 채우고 비우는 우리에게 스스로 예쁜 유니폼을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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