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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ug 24. 2022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치사할 때



아침부터 팀장에게 쓴소리를 들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맞지만 지시하는 말투가 묘하게 짜증 나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안기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속으로 한참 열이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메신저에 '네'라고만 건조하게 남기고 시킨 일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기분 나쁜 티를 최대한 내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월급을 받는 것뿐이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다. 그냥 하면 된다. 문제는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의 감정을 쓸데없이 예민하게 감지하는 내 마음이다. 본래 주변 환경 분위기를 빠르게 알아채고 수상한 냄새를 잘 맡는 내게 누군가의 까탈스럽고 퉁명한 말투는 상처가 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상사일지라도 말이다.


요즘 나는 혼자 팀장과 거리를 두는 중이다. 몇 년째 함께 일하다 보니 그의 일하는 방식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업무 지시할 때의 말투(본인 말이 다 맞다고 주장), 본인이 한 말을 번복하는 태도, 동료의 실수를 끝까지 추격해 그 근거를 몰아붙이는 행동 등등. 그 타깃이 내가 될 때도 있지만 다른 동료를 향할 때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한 번쯤은 부드럽게 넘어갈 수 없는 걸까?" 



물론 나는 팀원이기 때문에 발 밑의 조약돌만 보고 팀장의 자리를 쉽게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리더와 팀원의 역할은 다르고 보는 관점도 차이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별도의 시간도 주지 않고 업무 지시를 내린 뒤 빠른 피드백을 요구하면 속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끓어오는 수밖에 없다.

"아니 그럼 당신이 하라고!"


팀장에게 원단 폭격을 들은 날. 부글거리는 마음을 식혀야 할 때면 그에게 저주를 내린다. 흑마법을 쓴다든가, 비슷한 인형을 구해 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무서운 저주까지는 아니고 비 많이 오는 날 속옷까지 다 젖어버리길 기도한다든가 더운데 집 에어컨 고장 나라 등등 따위의 '고작?'이란 말이 어울리는 저주들.


이게 뭐라고 이런 치사한 상상을 하면 아주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 딴에 가장 적절하고 최선의 저주는 이렇게 치사한 거다. 너무 과하지 않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 ㅔ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짜증 나는 것들 말이다.


참 유치하지만 '쌤통이다' 정도의 저주로 나를 위로한다. 얄미운 동료에게 할 수도 있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동거인에게나, 말을 함부로 내뱉는 지인에게도 통용되는 몇 가지의 치사한 저주들. 이렇게 나만 알고 있는 몇 가지의 치사한 말들은 내 민낯을 드러내지만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다만 선악이 세트로 돌아다니며 나의 선함과 악함을 반복적으로 자주 들추어낼 뿐이므로 이 치사한 방법은 나의 악함을 더 깊게 두지 않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다. 최소한 남을 진짜 위협하는 나쁜 년은 되지 않기 위한 거리 조절이랄까.

 

타인의 불행과 내 감정을 나란히 두고
저울질하거나
그들의 불안을 내 위안의 재료로 삼는
치사한 인간

컴퓨터 메모장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육두문자를 써가며 화풀이하는 것도 나를 위로하는 방법 중 하나다. 면전에 대고 말은 못 하면서 내 속은 답답하니 그렇게라도 풀어야 다음에 얼굴 보고 인사라도 할 수 있다.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악한 면모를 꽁꽁 감춰야 할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까고 난 뒤에 그 후폭풍을 제대로 맞이할 배짱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 자꾸만 치사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태도를 창피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까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선악의 모습을 갖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각자의 책임이니까. 취업이 힘들어 지하철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어도 봤고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인 자리에 나만 초라한 조연이었던 경험 등 내가 겪은 최악의 몇몇 장면들이 있어서 이런 치사한 감정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저 '킥킥' 어이없는 웃음이 나는 것들, 듣고 나면 "얘 뭐야?"싶은 것들로 내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소심한 저주를 내릴 뿐이다. 쓰면서도 너무 한심하고 치사해서 얘기를 할까 말까 싶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모두에게 공개해 보겠다.


지금은 퇴사한 동료 둘과 함께 일했을 때였다. 나는 30대였고 그 둘은 20대, 나보다 먼저 입사했으니 둘이 원래 친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은 분위기가 싸한 게 내가 화장실만 다녀와도 둘이 하던 대화를 멈추고 메신저로 따로 이야기하는 것을 느꼈다. 셋이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 오해가 쌓일 만한 것도 없었고 그땐 내가 계약직이어서 부담스럽게 열심히 일하는 타입도 아니었는데 둘만 묘한 사인을 주고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상해 있었다.(물론 지극히 내 관점에서 느낀 일이다) 그래서 퇴근 후 노트에 그들에게 느낀 불만과 짜증을 적었고 박박 줄을 그으며 "옷에 김치 국물이나 튀라'라고 저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해서는 원래 같이 마시던 오후의 스타벅스 커피를 쏘지 않았고(내가 사야 할 차례였음) 나만 몰래 가서 텀블러에 돌체 콜드 브루를 테이크 아웃해왔다. 뭐가 예쁘다고 내 돈 들여서까지 커피를 사주냐는 치사한 마음을 담아!


그래서 마음이 편해졌나면?

당연하다. 소소하게 그런 식이라도 나 혼자 감정을 풀어 그들과 전과 다름없이 업무적인 표정을 지으며 일할 수 있었다. 아마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 했겠지만 결국 내 마음에 혼자 앙금만 남아 더 나쁜 쪽으로 상황이 흘렀을지 모른다. 욱하는 마음에 퇴사라든지, 그들 중 한 명에게 접근해 험담을 시도해 본다 등의 더더욱 치사하고 얕은 수작으로.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아닌 치사한 방법이 나에겐 감정을 추스르는 명상이 된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가부좌 틀고 마음만 바라보란 법이 어디 있겠나. 다들 어떤 식으로든 억울한 마음을 풀고 심신이 좋아지면 그게 명상이지. 나이 먹어 그게 뭐하는 짓이냐고 해도 어쩔  없고 유치하고 치사하다 해도 별도리가 없다. 때론 치사함이 사람도 살리고 나라도 구한다. 더럽고 치사해서  순간과 감정을 모면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가끔은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으니 나는  방식을 우아함이나 유쾌함보다는 치사함으로 통쾌한 맛을 보는 것일 이다. 감정을 해결하는 방법이 치사할수록  민낯이 까발리는 기분이지만  솔직히 싫지 않다.


의외로 자신에게 솔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요즘같이 보여주기  네모의 세상에선 혼자 있어도  뭔가를 꾸며내야 하고 보여줘야 한다. < 혼자 산다> 절대 혼자 사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들이 입고 쓰는 모든 것은 모두에게 보이고 유행이 되어 돌고 도는 세상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근사한 와인잔과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재밌게  영화에 대한 리뷰를 써서 공유하는  당연한 세상에서(이런 생활이 나쁘다는  아니지만) 언제나 약간의 허풍과 허세, 거짓말이 더해진  내게도 진짜처럼 보이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스스로를 위하는 방식으로 '치사함'을 선택할 때마다 은근히 통쾌한 기분을 맛본다.


내가 찌질한 인간이어서 다행이고  사실에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끼며 나의 '진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의식한다. 설정 샷에서 살짝 비켜난 우리의 사실적인 모습들. 치우지 않은 방바닥, 책상  쌓여있는 쓰레기,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삶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나만 있는 리얼 세상에서까지 숨기지 않는 이다.


직장인이지만 9 to 6까지 어떻게 매시간 열심히 할까? 주부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어떻게 밥을 할까? 딸이자 며느리지만 어떻게 양가 부모님들께 매일 효도하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어떻게 매일 착한 마음을 갖고 살지?



우리는 타인의 쩨쩨한 감정을 속좁고 유치하다고 판단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도 본다. 남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분명 나에게도 있기 때문에 멋쩍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매사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을 융통성 없다고도 하는 것처럼 헐렁하고 허술한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사람에게 하는 치사한 저주를 좋은 일이라고 포장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  하나일 뿐이며 다른 위로들도 많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치사하다고 생각'  속으로 '피식' 웃음  정도의 여유는 남겨두고 싶다. 진짜 나쁜 마음을 먹고  순간의 솔직한 감정을 담을 때도 당연히 있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별일'아닌 치사함들로 나의 감정과 솔직히 마주했다.

가능한 뒤끝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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