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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Oct 03. 2022

돈이 없어 여행은 못 가지만

방구석에서 얻은 용기로부터


가을이 되어서 그런가 요즘 너무너무 여행이 가고 싶다. 원래 여행보단 집을  선호하는 편인데도 웬일인지 지금이 아니면 영영 떠나지 못할  같은 마음이 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유유히 어디론가 떠나는 비행기가  보이고,  좋은 날씨에 사무실에 앉아 일만 하기엔 인생이 건조하다 못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거기에 수시로 네이버 드라이브에 저장해 놓은 지난 여행 사진이 알람으로 뜨니 이건  고문이 따로 없다.


시간도 없지만 돈도 없다구


나의 첫 해외여행은 스물한 살, 친구와 단 둘이 떠난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그때는 대학생의 배낭여행이 꽤 흔한 레퍼토리여서 모두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지고 자아와 꿈을 찾아 유럽으로 떠나곤 했다. 우리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우린 젊으니까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급작스럽게 계획을 짠 뒤 첫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 나라는 영국, 런던이었다. 여름방학 때 갔기 때문에 어느 정도 더위는 예상했었지만 외국 사람들의 향기를 맡으며 '아 이게 그 암내라는 거군'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공간 말고 냄새로 느껴지는 후각도 내가 지금 이국 땅에 서 있다고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다.


사진에서나 봤던 이국적인 풍경을 우리는 카메라에 마음껏 담았다. 2 버스  앞자리도 타보고 맛없는 피시  칩스를 먹으며 김치찌개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는 길거리에 보이는 주황색 쓰레기통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십장이나 찍어댔으니 스물한 살의 청춘들은 낯선 나라를  진지하고 즐겁게 탐미했던  같다. 물론 학생이라서  아낀다고 젤라토도 마음껏   먹고 쇼핑도 제대로 못했지만 프랑스에선 달팽이 요리를, 스위스에선 퐁듀를  먹는 배짱만큼은 잊지 않았다. 대체로 가난해도 즐거웠고 하루 종일 재잘재잘 얘기하며 마음껏 시간을 써버리는 청춘들 앞에 세상이 보여주는 마음은 넓었다.




스물두  아니면  살이었던가. 이번엔 고등학교 친구 셋과 강릉 바다에 놀러 갔다. 처음 가는 셋의 여행에 들뜬 마음으로 바다에 들어가 물장구도 치고 고기도 구워 먹고 숙소 잡지 말고 바다에서 자다가 일출을 맞이하자며 고운 바다 모래에 나란히 누워 비가 오는데도 꿋꿋이 잠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치기 어린 어린애들처럼 보이는데 그때는  일이  진지했으니 청춘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도  되는 일을 그냥 해보는 시간. 유치뽕짝인걸 알면서도 그때 아니면   없는 일들을 지나치지 않는 것들 말이다. 아쉽게도 무려 여자 셋이 갔지만 바닷가 헌팅은 하나도 없었고 친구  명이 카메라를 잃어버려 집에 가겠다는  달래고 어르는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결혼하고 대학교 친구들과 몽골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일도 안 하고 있어서 괜히 남편에게 눈치도 보였던 때라 미안함 마음을 감추고 나선 길이었는데 역시 여행은 여행. 순전히 밤하늘 별이 쏟아지는 광경을 몽골 사막에서 느끼고 싶단 이유로 떠난 여행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로 이루어진 한국인 단체 패키지 관광객의 일원으로서 다 같이 봉고차를 타고 사원과 사막을 돌아다니다 게르에서 긴 휴식을 갖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분명 패키지여행인데 어딜 안가. 가봤자 초원이고, 사막이어서 할 게 없어.. 기껏 해야 말을 타고 들판을 달렸고 몇 백개의 계단을 올라 사원을 둘러봤고 나머지 남아도는 시간은 개인 자유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목적이 있으니까, 밤하늘의 별을 마음껏 볼 거라는 기대로 어깨에 담요 하나씩 매고 숙소 근처의 작은 언덕을 올라 고개를 들었는데!


‘구름이 꼈네? 생각보다 별이 많지 않네? 밝지도 않고? 강원도 산골에서도 이것보단 많이 보겠는데?’

다들  말이 하고 싶었겠지만 서로 속상마음 들킬라 속으로  삼키고 ‘ 좋다, 좋다 연신 내뱉으며 어떻게든 사진을 찍고 누워 까만 밤하늘을 보며 각자 세계로 빠져들었다.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몽골의 밤하늘에 풀어놨을까?


밤하늘의 우수수 떨어지는 별을 보지 못했지만 몽골 여행하면 떠오르는 가장 행복한 장면은 믹스 커피를 마시며 사방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산속에서 이야기  우리들모습이다. 서른둘에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 위안을 나누면서 이제는 서서히 갈라질  친구들의 인생을 응원해줘야  시간이었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존중하고 가능하면   길게 안부를 나눴으면 좋겠는 마음을 담아 인생의 다음 챕터를 넘어가는 결의를 믹스 커피를 나눠 마시며 몽골에서 다짐했다.




뭐니 뭐니 해도 떠나고 싶은 이유   하나는 바로 런던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맘때쯤 가을이 되고 공기가 문득 차가워지면 어학연수로 지냈던 런던이 생각난다.


집을 구하려고 카페에서 빵과 주스를 시켜놓고 벌벌 떨며 영어로 뷰잉 전화를 돌리던 여름을 지나, 왕거미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던 플랏 하우스에서 맞이한 가을이 . 유독 런던의 가을은 빨강과 노랑이 다채로우면서도 뮤지컬을 보겠다고 나선 새벽의 거리는 채도가 빠진 회색빛 모습으로 남는다.


유일하게 여행이 아닌 일상을 보냈던 나라에서 가장 깊은 고독감을 맛보았던 가을의 저녁. 혼자 카페에서 나와 어둑해진 골목길을 걷는데 옆구리가  시렸다. 하필 공기가 차가웠고 6시밖에  됐는데 밖이 깜깜했고 다들 삼삼오오 가족들이 있는 따뜻한 집으로 가는데 나는 아무도 없는 플랏 하우스 2층으로 가는 사실이 더해져서였는지 모른다. 옆에 시시콜콜 이야기 나눌 사람은커녕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도 9시간 시차가 나는지라 타국에서 내가 당장 누릴  있는 유일한 기쁨은 작은 노트북으로 한국 예능프로그램을 보는 거였다.


한국이 싫어서 도망치듯 왔는데 결국 내가 그리워하는 곳이 엄마, 아빠가 있는 우리 집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난 어디 가서 든 잘 살 수 있다고 호기롭게 큰소리쳐놓고 막상 무섭고 쓸쓸한 마음을 감추기 바빴던 그때의 나. 괜히 씩씩한 척 엄마와 통화하던 날 엄마는 끊기 전  “우리 딸,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라고 말했다.


함께 살면서 저런 낯간지러운 말은 서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녀였는데  날은 엄마가 해준 말이 너무 마웠다. 아직까지   했지만 엄마의   마디는 6개월 동안 런던에서 꿋꿋이 버틸  있었던 위로였고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들었던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말이다.




지나고 보면 여행을 떠오르는 장면들이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뿐이다. 여행 가기 전에는 비행기 시간과 숙소, 반드시 가야  관광지를  계획해 놓으면서 다녀오고 나면 숙소에서 컵라면 끓여 먹은 일이나 호텔 화장실 창문이  뚫려 있어서 서로 민망했던 기억, 여행  배탈이 나서 화장실만 찾아다닌 사소한 장면들이 행의 기억 물꼬를 튼다. 모든 여행의 순간은 그렇게 작고 사사로운 것들 위에 덧칠되어 장면으로 남았다.


아마 매일 반복하는 생활에서 이런 사소한 일들은 아무 의미없을 것이다. 일어났으니  먹고, 출근하고, 전철에서 휴대폰을 하다 잠깐 하늘을 바라보면 어느새 하루가   있으니까. 평범한 하루에 평범한 행동과 평범한 시간이 더해지니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로 지나간다. 그게 일상이고 생활이다.


그렇게 8월과 9월을 보내고 10월이 왔다. 정말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서 해외, 국내 여행 모두 꿈꾸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만큼 하루하루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다. 여행 지명을 고르는 대신 주말 반찬을 고르고 숙소 별점을 보는 대신 당장 필요한 로션 리뷰를 읽는다. 요즘은 쇼핑욕도 줄어서  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으니 이런 때가  있나 싶다.


떠나고 싶다고 당장   있는 시간도 배짱도 없지만 사실이 서운하거나 아쉽지 않은  ‘지금   있는 것과 없는  이해하고 ‘지금 해야 하는  가늠하여 성의를 보이며 사는 날들이 좋기 때문이다.


방구석의 가을은 창문을  열어놓고 잠드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는 유일한 계절이고, 지나간 것들에 쓸쓸한 마음을 마음껏 느껴도 좋은 날이니까. 진초록에서 노랗게 여물어가는 잎들에게 새로움을 발견하고 단풍나무 아래를 걷는 일만으로도 행복한 계절이니까. 사계절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가을, 비록 방구석 여행이었지만 사진 하나하나를 보면서 가을밤을 보내기 좋았다. 다행스럽게도 돈이 없어 여행을  간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고 차라리  간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얻은 용기로부터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10 3일과 9. 역시 가을의 묘미는  시월의 공휴일에 있는  아닌가. 오늘이 지나가는  아쉽지 않은 이유는 단풍잎처럼 빨간  적힌 다음  월요일이 있기 때문이떠나는 대신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사두었고 쉬는  내내 책상 조명 아래서 한 줄 한 줄 밑줄을 그으며 읽는 가을을 내고 있다.


언제 갈지 모르는 나의 버킷리스트 《런던에서   사기》를  꿈꾸며 이번 가을에도 여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존재하고 있다. 몇 년 후 가을엔  런던 프림로즈 힐에서 노을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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