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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ug 10. 2022

하룻밤 50만 원, 영감의 공간


부산 광안리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여름휴가는 강원도 계곡이나 숲을 갔었는데 올해는 운전을 하지 않으려고 ktx를 타고 멀리 갈 수 있는 부산을 선택했다. 수원에서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다니. 정말 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게 ktx가 아닌가 싶다. 비싼 만큼 편하고 빨리 남쪽으로 데려다준다.


이번 여행 숙소는 내가 정했다. 일단 인스타그램에서 '부산 감성 숙소'를 검색하면 몇십 개의 사진이 후루룩 나오고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사진을 골라 예약했는데 8월 초, 성수기니까 어느 정도 금액은 예상했지만 후. 이틀에 100만 원 숙소가 가당키나 한 것인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월급의 반이다. 2주도 아니고 이틀. 단 2일.

괜찮겠어?


.

.

.

가보자고!


남편은 짐짓 놀란 눈치였지만 내 말만 믿고 한 달 반 전 숙소를 예약해 드디어 그날이 왔다. 부산역에 내려 점심으로 막창을 먹으려 했지만 오후 5시나 되어야 문을 연단 소식에 숙소 근처 조개구이집으로 변경했다. 비교적 사람이 없어 한적하고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왼쪽을 돌아보니 시원한 해변과 광안대교가 한눈에 보였다.


비로소 부산에 왔구나.


바다가 뿜어내는 특유의 청량감과 빨갛고 노란 파라솔 아래에 사람들이 알록달록 튜브를 가지고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였다. 도대체 이런 풍경을 본 게 얼마만인지. 그동안 고요하고 사람이 거의 없는 곳만 찾아다니느라 이렇게 활기찬 장면들이 낯설었는데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 휴가는 이래야 휴가답지.


짭조름한 조개구이를 맛있게 먹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해변을 앞에 두고 이차선 건너편에 있다고 했는데 같은 건물 아래층에 맥주집과 소주집이 있는 요상한 숙소의 입구. 진짜 이런 곳에 내가 본 그 사진이 있다고??


비밀번호 키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남편과 나는 소리를 질렀다. 꺄-


조말론 디퓨저 향이 코를 훅 스치고 숙소 사장님이 미리 틀어놓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 여행의 기분을 한껏 돋궜다. 그리고 통창에 보이는 광안대교와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처럼 존재했다. 행복이란 추상적인 단어를 물성으로 내놓아야 한다면 이 풍경을 내보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선택한 이곳은 올여름 휴가의 완벽한 공간임을 감지했다.



공간이 주는 안정감과 생활감은 기꺼이 노력하면 집에서도 느낄 수 있다. 더웠던 퇴근길, 씻고 에어컨을 트는 밤이 있어 감사하고 콩나물과 고추장, 계란 프라이에 밥을 비벼먹는 생활과 설거지의 고단스러움도 충분히 집을 안정시키는 일과다. 깨끗한 이부자리도 깔끔하게 비워져 있는 쓰레기통도 모두 내 손으로 일일이 해결해야 할 일이지만 결국 그런 것들이 집의 안정을 높이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집이란 공간의 생활감은 안정감을 준다.


여행지에서도 공간의 안정감은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잠만 자는 숙소를 하룻밤에 50만 원이나 주고 쓰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쓰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숙소는 영감이 떠오르는 창작 공간으로도 역할을 할 수 있다.


숙소에 마련된 깨끗하고 하얀 침구, 거실 한편에 놓은 오브제 같은 욕조, 그 주위를 둘러싼 바다가 비치는 거울은 광고에서나 보는 연출된 공간처럼 보였고 그렇게 이쁜 공간을 나는 돈을 주고 빌렸다.

왜?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으니까.


비싸서 엄두도 못 낸 다이슨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이솝 어메니티로 손도 씻고,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하고 로션도 바른다. 또 늘 휴대폰으로 듣던 음악을 제네바 스피커를 통해 들으니 사운드의 풍성함이 남달랐다. 덕분에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음악이 늘 함께하는 기억까지 덧붙여져 부산에서 처음 해보는 여행 스타일을 얻었다.


공간은 장소만 정하는 게 아니라 경험도 따라온다. 집에서는 쓸 수 없던 기기를 사용해 보고 어딜 가나 낯선 향이 곳곳에 머물러 후각적으로도 날 선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웰컴 드링크로 준비된 와인은 부산역에 내려서도 생활감을 묻혀 온 여행객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는 의식임이 분명했고 이 모든 조합이 만들어낸 분위기는 나에게 큰 한방을 날리면서 이제야 우리 부부는 여행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여기에 머무르면서 공간의 힘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낀 건 여행 이틀째 아침이었다. 분명 휴가인데도 꿈에서 지금 직장 상사와 예전 직장 상사까지 나와 같이 일하다 깬 아침. 심지어 출근 알람도 울리기 전 눈을 뜨니 머리도 아프고 눈도 뻑뻑해 계속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가 물 마시려고 거실로 나간 순간.




아침 해가 바다에 부서지는 풍경을 보고 '너무 좋다'라고 주어 없는 서술어를 되뇌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좋은 건지 모르겠는데 아침의 바다, 그 위에 내리쬐는 햇살의 부서짐, 모래사장에 곱게 누워 일할 준비를 하고 있는 파랑의 파라솔들. 방콕인지 발리인지 창 한편에 우뚝 서 있는 야자수 나무까지 어우러진 풍경이. 꿈에서까지 일한 억울함이 아침에 바라본 그 한 장면 덕분에 싹 가셨다. 냉장고의 물을 벌컥 마시며 바라보는 아침 바다 앞에 나는 생활자도 아니고 여행자도 아닌, 낯선 존재로서 그 순간을 보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식탁에 잠시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데 아침 7시도 안 되서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들과 물놀이를 시작한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이곳에서의 시간을 허투로 써서는 안 되는 사람들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들을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에 50만 원. 분명히 비싼 금액이다. 하지만 아침마다 이런 행복을 마음에 확실하게 전해준다면 전혀 아깝지 않은 돈으로 증명됐고 여기에 그동안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일의 버킷리스트가 추가되었으니 영감의 공간으로도 훌륭했다.



신기한 건 틈날 때마다 창문에 코를 박고 바다와 해변을 보니 바다수영이 너무 하고 싶다는 거였다. 평소 유교걸답게 수영복 입기를 스스러워 하는 내가 해변에서는 그 누구도 수영복 입은 다른 사람을 힐끗거리지 않고 각자 자신만의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유쾌하게 보였다. 아빠가 아이를 안고 파도 안에서 첨벙거리고 있고, 연인들이 튜브를 타고 논다. 아이들은 각자 모래에 파묻혀 있고 여자 친구들끼리 혹은 남자 친구들끼리 온 무리들도 삼삼오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한다. 그러니까 정말 위에서 보면 모두 제각각 자기들끼리 재밌게 놀고 있는 거다. 남들이 어떻게 뭘 입고 놀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면서.


그리고 지평선 가까이 패들보드를 타는 사람들도 떠들썩한 해변가를 피해 자신만의 조용한 바다의 공간을 즐기고 있는 게 평화로워만 보여 너무나도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풀빌라의 수영장이 아니라 파도가 치고 지평선 끝까지 넓게 펼쳐지는 자연의 바닷속에 몸을 맡기고 싶은 간절함. 그래서 버킷리스트에 바다수영과 바다로 멀리 나가 패들보트를 타는 일을 적었고 그것만으로 뭔가 올해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그동안 전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을 소중하게 마음먹어 보는 일. 의외인 장소에 와서 얻은 큰 수확이자 영감이었다.


사실 휴가까지 와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고 책만 실컷 읽고 싶어 e-book에 담아 기차 안에서도 읽고 침대 위에서도 뒹굴거리며 읽었다. 왠지 식탁에 앉아 글 쓰는 일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니 시간과 장소,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해서 내 안의 글감이 나타나지 않았던 거다. 불만이 있고 괴로운 지점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 고심하며 썰을 풀 텐데 여기서는 모든 게 순조롭고 좋아서 행복에 대해 별로 쓸 말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모든 영감은 글의 재료가 되는 법이라 했던가.


결국 나는 이 장소와 공간에 대해 쓰기로 했고 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나의 서재에서 차분하게 그때 받았던 영감에 대해 글을 적고 있다. 그곳이 아니었으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일과 그날의 풍경, 떠오른 영감을 사진 속 풍경처럼 이 지면에 꽉 붙잡아 두고 싶었다. 색색의 알록달록했던 파라솔과 물 빠진 청바지 색처럼 서늘했던 파랑의 바다 모습을. 햇빛에 반짝이며 고운 모래가루를 품은 해변이 여름이란 계절과 부산이라는 공간과 너무 잘 어울렸고 그 속에 내가 풍경처럼 서 있던 일이 참 좋았다. 거기 있었다고 해서 그동안 품어 온 불안과 걱정이 모두 증발된 것은 아니었지만 잠시, 아주 잠시 동안 그 문제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휴가는 제 몫을 다 했다.



한 친구는 8월 말 부산으로 가족여행을 간다고 한다. 숙소를 고르고 있는데 생각해 둔 곳이 너무 비싸서 조금 더 가성비 좋은 곳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에 하룻밤을 머물러도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예약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분명 그 숙소가 지니고 있는 어떤 포인트가 너의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며, 더 기분 좋은 방향으로 여행을 이끌 거라고. 좋은 장소는 좋은 계획을 이끌고 좋은 계획은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 거라고 메시지에 남겼다.


가끔은 집과는 정반대의 모양을 가진 공간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반드시 역동적이거나 다이내믹하게 여행하지 않아도 생각의 전환을 얻는 작은 힌트가 짧게 머무르는 공간에 숨겨져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이번 부산여행은 인사이트적인 장소가 되었다.


앞으로 1년 또 열심히 돈을 저축해 내년에도 좋은 공간에서 낯설고 풍부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그때는 정말 바다수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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