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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ul 31. 2022

여름의 문장들


부산 휴가를 앞두고 장염에 걸려 며칠간 고생 중이다. 먹방 계획도 다 짜 놓았는데 가서 하나도 먹지 못하고 숙소에 누워만 있다 오면 안 된단 마음에 아픈 배를 움켜 잡고 퇴근 후 병원도 가고 죽도 배달시켜 꼭꼭 씹어 먹었다. 다행히 지금 배는 조금씩 나아졌고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아직까지 음식을 가려먹고 있다.


아픈 동안 책은 하나도 읽지 못했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써내야 하는 서평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고 꾸역꾸역 써 내려간 지난 일요일이 있다. 열도 나고 몸도 으슬으슬 추워 월요일 연차를 써놓고도 일요일  마감을 지켜낸 나 자신이 너무 뿌듯했던 지지난주. 물론 월요일에 크게 아프지 않아 하루를 공짜로 얻은 듯해서 더 기분이 좋았던 건 비밀이지만.


혹시 장염의 원인이 냉장고 청소를 하지 않아서일까 봐 상할 듯 말듯한 음식을 버리고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섞은 물을 구석구석 뿌려 냉장고 안을 박박 닦았다. 그걸로도 부족해 나무 수저와 은수저를 모두 소독하고 행주도 깨끗하게 빨아 햇빛에 잘 말려 놓은 월요일. 그리고는 배가 싸하게 아파 점심도 굶고 회사 구석에 쪼그려 누운 날로 화, 수, 목, 금을 채웠다.



인간이 간사한 건지 아픈 게 좀 나아졌다고 책이 읽고 싶어졌다. 아플 땐 진짜 죽을 듯이 괴로워서 숨만 쉬어도 힘들었는데 배의 꾸륵꾸륵함이 멈추니 스멀스멀 손에 든 책 페이지를 넘겨 본다. 간간히 찾아오는 싸르르한 고통을 잊고 싶어서 약 같은 문장을 찾아 헤매는 나의 손길이다.


유독 올여름엔 소설을 많이 읽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나의 상황을 잊어버리는 것. 내가 찾아낸 현실도피의 방법인데 그들의 여정을 뒤쫓기만 해도 내게 남겨지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건전하게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내 마음에 남겨지는 것들이 야망이든, 용기든, 위로든 뭐든. 그게 좋아서 소설과 에세이를, 책과 문장을 이 여름에도 찾아 헤매는 이유다.


아. 올여름, 우연히 알게 된 잡지 「우먼카인드」를 빼놓고서는 이 더위에 살아남은 방법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문화잡지'를 지향하는 계간지 「우먼카인드」를 읽으며 모처럼 연필로 밑줄을 긋는 클래식한 기쁨과 좋은 문장을 내 손으로 담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뜨거운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운동까지 더해 땀으로 절여진 몸을 이끌고 집에 온 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이 책을 읽는 20분의 소중한 시간은 하루 중 유일하게 우주에 떠다니는 우주인이 될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 덕분이 뜨거운 이 여름이 다양한 문장으로 채워졌다.



화가나 음악가, 작가의 창의력은 실패와 부족함에 대한 감정을 다스리며 지칠 줄 모르고 작업했지만 연이어 평범한 결과만 나와 포기하려는 순간 직전에 발휘된다. 명상가에게 깊은 내면의 평화가 깃드는 순간은 오랜 시간 동안 앉아서 번뇌에 시달리다 호흡을 따라 번뇌에서 점차 벗어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찾아온다.


무언가를 더 잘하고 싶다면, 가장 힘든 부분을 연습해야 한다. 흔히 제일 힘든 부분은 제일 하찮은 부분이다. 그런 부분을 다루려면 우리는 더 현실적인 태도로 더 인내해야 한다. 또한 여정 자체의 점진적 특성으로 시행착오를 받아들이는 데 더 호의적이어야 한다.


womankind VOL.14 혼자 있는 시간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제니퍼 쿤스트


이 글귀에 밑줄을 그으며 덥고 짜증 나 모든 걸 풀어헤친 마음을 잡았다. 인생의 모든 일엔 수련이 필요하고 연습을 해야 하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특히 하찮은 부분. 매일 쓸고 닦고 비우는 청소를 게을리하지 말고 이벤트를 기획하기 위해 서칭 하는 6시간의 웹서핑 수고를 헛되이 여기지 말고 허리 통증 없는 10분의 시간을 위해 땀 흘리는 1시간의 필라테스를 빼먹지 말자고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출간하고 싶은 나의 책을 위해 지금 쓰고 있는 글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유독 올여름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더위에 힘들어 색이 빠진 연한 계절 같다. 매일 회사에선 일이 터지고 그걸 해결하느라 머리를 쥐어짜니 하루하루가 거북하고 답답했다. 늘 똑같은 집과 운동 루틴. 먹는 밥도 거기서 거기. 절망도 없지만 기대도 없는 날들에 유일한 청량함이 있었다면 그건 점심 식사 후에 마시는 레몬 탄산수였다. 그것 말고는 초록이 나부끼는 나무도 보지 못했고 보기만 해도 시원한 파랑 바다에 발을 담가 본 적도 없다. 그래서 휴가만큼은 이 여름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 여름 휴양지의 대표 도시 부산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숙소에서 보이는 광안리의 해변과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글 따위는 잠시 뒤로 물러두고 하염없이 바다 멍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내 안에 가득 말이 차오르면 아이폰 메모장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다. 오직 그 시간만을 고대하고 있다.



글을 쓰는 여성들을 생각할 때면 촉수 낮은 전등불 아래 작은 밥상을 펴놓고 연필 혹은 볼펜으로 불경을 베껴 쓰고 가계부에 낙서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잔뜩 웅크린 어깨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가 목격한 최초의 여성 '작가'는 그 두 사람이었다.


womankind VOL.14 혼자 있는 시간

<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이주혜



휴가에서도 글 생각이라니. 멋지고 좋은 글을 쓰지도 못하면서 온갖 허세는 다 부리는 꼴이지만 그래도 좋다. 바다가 보이는 식탁에 앉아 쓰는 글이니까. 알파벳을 써도 그 기분만큼은 무라카미 하루키 부럽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언제 어디서든 어깨를 웅크리고 어떤 글이라도 쓰는 사람이고 그 혼자인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기에.


부산까지는 기차를 타고 갈 계획이어서 휴대폰에 책 하나를 다운로드 받아 두었다. 요즘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의 부엌」인데 부산행 기차 안에서 읽는 책으로 선택했다. 또 책에 관한 책이냐고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어떡하나. 좋은 곳에 가는데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고르는 게 당연하지.



여름에 찾은 문장들은 내 마음을 더 뜨겁게 만들거나 반대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가라 앉히면서 집 밖에서 크게 우는 매미소리와 맞물렸다. 아마 나중에 그날의 책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 느꼈던 온도와 습도, 매미의 합창 소리도 머릿속에 함께 울릴 것이다. 그렇게 또 여름의 책 글귀는 계절을 타고 내 마음에 남는다.





그 밖의 여름의 문장들


고독사 워크숍

(박지영/민음사)


저는 이런 사람들이 좋아요. 별 볼 일 없이 살다가도 고결한 돼지처럼 죽을 수 있다고 믿는 거 보세요. 정말 사랑스럽지 않나요? 이렇게 속물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사람들. 자기혐오와 자기 구애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마침내 고독사에 이르는 법이거든요.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김민철/미디어창비)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도 이마엔 자신만의 별이 박혀 있단다. 사막의 밤이, 파리 뒷골목이, 제주도 새벽의 들판 풍경이, 길모퉁이 평범한 카페에서 들은 음악 한 줄기가, 그림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별이 되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거지.



튜브

(손원평/창비)


정말 변하고 싶은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가. 누군가의 고요한 응원을 받으며 자신만의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나가고 싶지는 않은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자기 자신을 깨부수고 나오고 싶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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