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난 뒤, 어쩐지 저를 꾸미는 것엔 인색해져 버렸습니다. 매 계절마다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고, 온라인 쇼핑몰 목록을 매때 들어가 보던 저였는데 전업주부로 직업을 옮기니 제가 원하는 욕구보단 가족을 위한 삶, 집 안에 쓰는 돈에 더욱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애써 참으며 이것이 올바른 주부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서서히 내적 불만이 생기고 저 자신을 한 걸음 뒤에 놔두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나타내던 취향들이 모조리 누구의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 뒤에 가려져 늘 그만그만한 옷과 액세서리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저를 꾸미는 일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청소를 하는 데 굳이 핏이 좋은 청바지를 입을 일이 없었고, 귀걸이나 시계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으니 기존에 있는 것들도 언제부턴간 숨 죽이고 서랍에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아이가 없는 주부인데, 조금은 저의 취향을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은 '귀찮음' 때문에 편하고, 심플하게란 명목으로 저의 긴장감을 조금씩 놓았던 것 같습니다. 집이란 공간은 늘 저를 품어주는 존재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희미하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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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엄마가 늘 말하지만 휴일이라고 해서 잠에서 막 깬 듯 후줄근한 원피스나 트레이닝복 차림 이어선 안 돼. 가장 예쁜 옷을 입어라. 내일은 또 내일에 어울리는 예쁜 옷을 입으면 되니.
다시 말하지만 육체를 보살펴야 한다. 네 육체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말을 들려주고(책으로 라면 더욱 좋지) 좋은 향기를 맡게 해주어라. 해도 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나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 몸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정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그리고 정신보다 육체를 위하는 게 효과가 빠르고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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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3년 차가 되면서 오롯이 몸으로 느끼는 건 육체의 소중함인 것 같습니다. 한창 일 할 때 챙겨 먹지 못한 비타민을 지금 꼭꼭 챙겨 먹고 건강을 위해 필라테스를 시작합니다. 몸이 아프면 제일 먼저 짜증이 나고, 그러면 정신적으로 하루 종일 혼자 집에서 힘들게 됩니다. 일을 할 땐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 억지로라도 몸을 돌보았지만 홀로 일할 땐 스스로 기운을 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잘 살피고 통제하는 일이 주부에겐 참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건강한 육체에서 올바른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고리타분해 보여도 인생에 깊이 새길 진리입니다.
가계의 흐름이 보이고 조금씩 집안일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 소소하게나마 저의 취향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기분을 내보려 예쁜 손목시계를 차고 밀대 걸레를 밀고 심플한 링 반지 5개를 손가락에 걸어 빨래를 갭니다. 햇살 받은 손의 리듬은 작은 반지로 반짝여 저 혼자만 보더라도 충분히 기분이 좋습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 패셔너블하게 걸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갑니다. 고작 3분 만에 다시 집에 들어오더라도 가까스로 꾸미고 나간 저의 모습에 생기가 돕니다. 주부의 취향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역할에 가려져 있던 나를 끄집어내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 싸인 삶으로 조금씩 확대해 가는 것.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를 거울 앞에 뚜렷한 모습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조금 더 부지런하다면 예쁜 사진으로 남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자연스럽게 찍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예쁜 링 반지는 고무장갑에 가려져 빛을 못 볼지라도 나 스스로 내 몸을 돌본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저의 노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취향을 조금씩 더 늘려 가보기로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초록색 다이어리를 구입해 별 것 없던 하루를 적어 봅니다. 좋은 책을 읽고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문장을 되씹어, 좋은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해주고 싶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분명 좋은 에너지가 되어 돌아올 테니까요.
주위 사람들은 늘 물어봅니다. "집에서 뭐해? 심심하지 않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수 있는 시간도 있으니 충분히 행복을 늘려 갈 수 있다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위를 채우면 자연스레 좋은 에너지가 내 안에 쌓일 것입니다. 내면의 단단함은 이런 취향들이 쌓일수록 강해질 것입니다. 집에 나를 존중해 주세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에너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또한, 작지만 확실한 주부의 취향은 살림을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