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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Dec 25. 2017

주부의 취향으로 둘러싸인 삶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난 뒤, 어쩐지 저를 꾸미는 것엔 인색해져 버렸습니다. 매 계절마다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고, 온라인 쇼핑몰 목록을 매때 들어가 보던 저였는데 전업주부로 직업을 옮기니 제가 원하는 욕구보단 가족을 위한 삶, 집 안에 쓰는 돈에 더욱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애써 참으며 이것이 올바른 주부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서서히 내적 불만이 생기고 저 자신을 한 걸음 뒤에 놔두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나타내던 취향들이 모조리 누구의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 뒤에 가려져 늘 그만그만한 옷과 액세서리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히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저를 꾸미는 일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청소를 하는 데 굳이 핏이 좋은 청바지를 입을 일이 없었고, 귀걸이나 시계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으니 기존에 있는 것들도 언제부턴간 숨 죽이고 서랍에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아이가 없는 주부인데, 조금은 저의 취향을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은 '귀찮음' 때문에 편하고, 심플하게란 명목으로 저의 긴장감을 조금씩 놓았던 것 같습니다.  집이란 공간은 늘 저를 품어주는 존재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희미하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어쩐지 요즘 좋아져버린 그린 색의 다이어리와 자주 쓰는 안경입니다. 



"

[딸에게 주는 레시피]


엄마가 늘 말하지만 휴일이라고 해서 잠에서 막 깬 듯 후줄근한 원피스나 트레이닝복 차림 이어선 안 돼. 가장 예쁜 옷을 입어라. 내일은 또 내일에 어울리는 예쁜 옷을 입으면 되니.


다시 말하지만 육체를 보살펴야 한다. 네 육체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말을 들려주고(책으로 라면 더욱 좋지) 좋은 향기를 맡게 해주어라. 해도 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나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 몸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정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그리고 정신보다 육체를 위하는 게 효과가 빠르고 좋으니까

"


주부 3년 차가 되면서 오롯이 몸으로 느끼는 건 육체의 소중함인 것 같습니다. 한창 일 할 때 챙겨 먹지 못한 비타민을 지금 꼭꼭 챙겨 먹고 건강을 위해 필라테스를 시작합니다. 몸이 아프면 제일 먼저 짜증이 나고, 그러면 정신적으로 하루 종일 혼자 집에서 힘들게 됩니다. 일을 할 땐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 억지로라도 몸을 돌보았지만 홀로 일할 땐 스스로 기운을 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잘 살피고 통제하는 일이 주부에겐 참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건강한 육체에서 올바른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고리타분해 보여도 인생에 깊이 새길 진리입니다.


가계의 흐름이 보이고 조금씩 집안일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 소소하게나마 저의 취향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기분을 내보려 예쁜 손목시계를 차고 밀대 걸레를 밀고 심플한 링 반지 5개를 손가락에 걸어 빨래를 갭니다. 햇살 받은 손의 리듬은 작은 반지로 반짝여 저 혼자만 보더라도 충분히 기분이 좋습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 패셔너블하게 걸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갑니다. 고작 3분 만에 다시 집에 들어오더라도 가까스로 꾸미고 나간 저의 모습에 생기가 돕니다. 주부의 취향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역할에 가려져 있던 나를 끄집어내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 싸인 삶으로 조금씩 확대해 가는 것.


 

작지만 확실한 취향, 핸드드립 커피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나를 거울 앞에 뚜렷한 모습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조금 더 부지런하다면 예쁜 사진으로 남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자연스럽게 찍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예쁜 링 반지는 고무장갑에 가려져 빛을 못 볼지라도 나 스스로 내 몸을 돌본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저의 노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취향을 조금씩 더 늘려 가보기로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초록색 다이어리를 구입해 별 것 없던 하루를 적어 봅니다. 좋은 책을 읽고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문장을 되씹어, 좋은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해주고 싶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분명 좋은 에너지가 되어 돌아올 테니까요.


주위 사람들은 늘 물어봅니다. "집에서 뭐해? 심심하지 않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수 있는 시간도 있으니 충분히 행복을 늘려 갈 수 있다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위를 채우면 자연스레 좋은 에너지가 내 안에 쌓일 것입니다. 내면의 단단함은 이런 취향들이 쌓일수록 강해질 것입니다. 집에 나를 존중해 주세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에너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또한, 작지만 확실한 주부의 취향은 살림을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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