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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an 14. 2018

막돼먹은 며느리 씨?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결혼식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화장을 하고, 제일 아름다운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니까요. 하지만 생활은. 멀리서 보면 참 예쁘지만 가까이서 보면 뒤죽박죽인 날들입니다. 배우자 한 명과 결혼을 했을 뿐인데 가족사진을 보면 한껏 구성원이 늘어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이라는 건, 결국 친밀한 대인 관계가 전보다 넓어진 것입니다.


그 많은 구성원 중에서도, 며느리라는 단어와 짝이 잘 어울리는 단어는 단연 '시어머니'일 것입니다. 중학생만 되어도 이것쯤은 너끈히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대한민국의 고부 사이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면서도 어쩐지 글로는 세세하게 풀어내기 힘든 관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글을 적고 있는 저조차도, 시어머님에 관한 말을 하려고 하니 머릿속이 뒤엉킵니다.


아, 물론 저의 어머님은 다행히 상식이 통하시는 분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이 부분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친구의 시어머니, 다리 건너 건너의 시월드 이야기를 들으면 '저게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이야기인가?'라고 고개를 저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오시는 건 애교일 정도로 안하무인의 시누이와 며느리를 철저하게 다르게 인식하시는 분들이 많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저의 어머님은 정말로 정말로 평범하신 어머님이셨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죠.


아, 물론 이곳에서 저의 시어머님을 자랑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상식이 통하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가끔은 불편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집에 방문하시기 전 꼬박 연락을 주시고, 다 같이 외식하는 자리에서도 먼저 식사값을 내주시고, 제 생일 때마다 따로 용돈을 챙겨주시는 시월드이지만 왜, 한 번씩 삐걱거리는 마음이 드는 걸까요? 며느리에게 시댁은 어쩔 수 없는 우주인 걸까요.


배우자 손만 잡았을 뿐인데


결혼 전, 막역하게나마 시어머님과 저의 관계를 다짐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는 어머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 단지 호칭만으로 상상하며 '이런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라는 저만의 생각이었죠. 바로 '어머님을 팀장님처럼 모시자'였습니다. 저의 엄마를 빼놓고 엄마뻘 되는 여성과 식구처럼 지내는 것이 많이 어려울 것 같아 찾아낸 결론이었습니다. 그나마 직장 생활에서 여자 상사님을 모시면서 큰 트러블 없이 잘 지냈으니 딱 그만큼 거리를 낸다면 50% 정도는 건강한 고부 생활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것입니다. 너무 사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공적인 사이도 아닌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는 것'은 모든 사이에서도 허용되면 좋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에서 제일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부부 사이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바로  고부사이란 걸, 결혼 후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내 부모를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저희 부모님에게 결코 효녀는 아닙니다. 제 맘에 안 들면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못된 딸, 힘들 때마다 철없이 기대는 못난 딸일 뿐입니다. 우리 부모님에겐 다정스럽게 애교 한 번 못 부리는 제가 단지 시부모님이라고 어떻게 살갑게 굴 수 있을까요. 


천천히 우리에게도 공통분모가 생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 어떤 인간인지 탐색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호칭과 서열만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사람 vs 사람, 여자 vs 여자로 잘 살펴봐야 합니다. 무조건 한쪽에서 모든 걸 요구하고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시어머니 앞에 며느리는 무조건 순종하고 순응해야 했습니다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고 사람은 더욱 크게 변합니다. 지금은 며느리 눈치 보는 시어머니들도 많이 생겼다고 하니 그만큼 우리의 고부 관계는 서로가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할 수 있도록 다시 재정비되어야 할 듯합니다.


2인3각 경기의 승리는 반환점을 도는 것이 아니라 얼만큼 안정적으로 갈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 마스다 미리]


여러 모습의 내가 모여서 하나의 내 모습을 만들고 있다.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늘려 간다. 

합체해서 강해지는 나.

"



참 좋은 말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고정시키지 않고 때와 상황에 따라 그 역할에 맞게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아무래도 며느리라는 역할은 머리도 크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 본 이후 다는 명찰과 같아 여러 개의 가면도 쓸 줄 알고, 본모습의 나를 숨길 줄도 아는 때에 새로운 가족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원래의 나(딸, 친구, 대리, 애인)라고 여겼던 모든 가면은 따로 두고 또 다른 가면을 만들어 써야 할 때입니다. 아마 어떤 성향의 시어머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가면의 색깔이 달라질 테지만  미리 두려워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론 어머님이 저를 너무 딸처럼 여기셔서, 저도 어머님을 엄마처럼 생각해 상대방의 고유영역을 훨씬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어김없이 서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걸로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어머님은 저의 팀장님이시니까요. 직장에선 얼마든지 논쟁이 있고, 조직의 발전을 위해 서로 알아가는 일이 필요하니까요.


대리의 직급인 저는 팀장님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합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부턴 행동을 조심하도록 합니다. 또한 감정도 더 쏟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가 아니니까 당연하지"라고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꾸 감정적으로 다가가면 서운한 일만, 섭섭한 것들만 주위에 떠다니게 되므로  어머님과의 거리에 순풍이 불 정도, 딱 그만큼 거리를 두도록 합니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의 미묘한 신경전이 생깁니다. 

한 명은 위대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또 한 명은 위대한 배우자라는 이름입니다. 

분명한 건 이 셋이 삼각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이 함께 호흡을 맞추며 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빨리 가려고 하면 중심을 잃고 쓰러집니다. 가정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배우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구축한다 한들, 배우자 너머에 따뜻하게 앉아 계신 양가 부모님과 그 가족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만 잘 살 수 있나요? 우리 엄마, 아빠도 함께 잘 살아야 저도 행복하지요.

마찬가지로 배우자와 배우자의 부모님도 행복해야 다시 제가 행복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시어머니는 예전 자신이 며느리였던 때를 조금만 더 생각해 주면 어떨까요?

젊은 새댁이기 때문에 호기롭게 모든 것을 쥐락펴락 하고 싶었던 때가 있음을 알아주시기를.

또한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갖고 있는 삶과 살림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이란 걸 알 수 있기를.

세상의 막돼먹은 며느씨였던(시어머님), 그리고 지금의 막돼먹은 며느씨들이여, 어쨌건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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