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닿는 바람이 쓸쓸하게 차가워질 때면 매해 그날이 떠오른다. 태어나 처음 원가족과 떨어져 타국에서 혼자 지냈던 때 말이다.
스물 다섯 나이에 진짜 나를 찾겠다며 호기롭게 직장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떠난 나는 애니메이션에서나 보일법한 큰 왕거미가 돌아다니는 런던 플랫 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돌아가는 한국행 비행기표를 알아봤다. 쉬운 영어도 제대로 못해 더듬더듬 말하며 얻은 플랫 하우스가 너무도 자연친화적이고 고작 그 거미하나를 다루는 일조차 처음 해보는 거라 너무 무서워서였다. 6개월만 지내도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던 멋진 나는 잊어버리고 단 한 달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오래 울다 잤다.
여름에 떠났지만 유독 초가을의 런던이 매번 생각나는 이유는 코스타 카페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친구도 못 사귀고 매일 하는 일이라곤 어학원에 갔다가 한국 사람들과 몇 마디 나누고 집에 오는 착실한 루틴이었다. 친한 사람이 없어 혼자 카페에 가 영어숙제도 하고 책도 읽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 해가 일찍 저무는 유럽 특유의 겨울은 저녁 6시만 돼도 집에 오는 길이 참 깜깜해 옷깃을 올려 목을 단단하게 여미게 했는데 더 큰 문제는 코스타 카페를 나서는 순간마다 슬펐다는 거다. 쌀쌀한 바람은 나를 외로운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다들 가족이 있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만 아무도 없는 플랏 하우스로 가는 길이 왜 그렇게 외로웠는지. 분명 그런 외로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기꺼이 집을 떠나왔으면서 9시간 시차가 나는 먼 나라의 엄마와 아빠가 있는 집이 너무 그리웠다.
플랏하우스의 작은 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일부러 따뜻한 수프를 끓이고 라면 한 봉지를 뜯어 수프에 찍어 먹으며 싸이월드에 글을 남겼다. 부모님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 않아서 쉽고 빠른 소통 방법이 내가 싸이월드에 사진과 글을 올리면 엄마와 아빠가 댓글을 남기는 거였다. “춥겠다. 몸 조심해.”, “방 따듯한 니.” 같은 짤막한 글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옆에 있을 때 서로 지겹게 하던 말들은 어느새 한국에서 런던까지 오는 길에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로 중무장하고 나타났다. 매일 쏟아지는 부모님의 관심이 버겁다고 느꼈던 모든 날들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정말 우리가 함께 있었나. 비가 오면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온 아빠가 식탁 위에 놔두었던 우산을 챙겨 갔었나. 저녁 먹고 오냐는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현관문을 나서고 그에 말없이 서운해하던 엄마의 표정을 못 본척하는 내가 보였다.
비를 품은 회색 구름을 몰고 다니는 런던답게 가을은 나의 쓸쓸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아무리 말 잘 통하는 친구들과 재밌게 놀아도 헤어져 집에 오는 시간이 되면 외로웠다. 플랏 하우스의 안주인이었던 미얀마 언니의 따뜻한 헬로 인사만이 유일하게 하루를 거두는 말이었다.
몇 년을 이 날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여기는 나의 유토피아여야 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여기마저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어디로 가야 행복할까, 결국 나는 어디 던져놔도 불평거리만 만드는 사람인가, 내 그릇은 간장 종지만 한 건가, 복에 겨워 어깨춤을 추고 있는 건가, 이 모든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저 마음 밑바닥에서 둥실 떠오르는 것이 무서웠다. ‘괜히 왔다 ‘는 생각이 드는 게 정말이지 무서웠다.
홍인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단단한 자아를 찾아 떠난 곳에서 나는 제일 약한 모습으로 다녔다. 그리고 가장 겁날 때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스칠 때였다. 퇴직금을 몽땅 쏟아부어 비행기표를 끊고 어학원을 등록하고 모자란 부분은 아빠한테 빌려 떠나온 타국이었지만 지내면 지낼수록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매일 영어 단어를 외우고 느린 발음으로 대화를 해도 자꾸만 더 움츠리게 되는 생활이 반복됐다. 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중식당을 찾아 익숙한 음식을 먹고 코스타 카페에 앉아 모국어로 된 책을 읽어도 계속 넓어지는 마음속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오후엔 큰 쇼핑몰 안에 있는 아이스링크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이방인의 감정은 설레고 신기하면서도 결국은 외로움에 가닿는. 모순 가득한 날이었다.
글을 쓰면서 또다시 기억에 젖어 런던에 잠시 머물렀다. 지금은 한국의 방에서 작은 테이블에 아이패드를 올려두고 그날의 쌀쌀함을 기억하고 있지만 매번 겨울에 이 감정이 되살아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혼자였던 쓸쓸함을 상쇄시켜 주었던 엄마 말이 기억에 남아서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내!”
엄마와 통화하며 버스에 내려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도 뭐 똑같은 하루였다. 잠깐 해가 반짝여 런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와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시간. 처음에는 해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오버하나 싶었던 행동을 런던 생활 3개월 만에 나도 똑같이 하고 있던 시간. ‘해는 중요해. 무조건 해나면 바깥으로 나가야 해. 그게 여기서 사는 생존법이야.‘ 마침 엄마와 그런 얘기를 하면서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 폭동은 잠잠해졌느냐 따위를 주고받던 우리의 대화 말미에 엄마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쫌 간지러웠다.
뭐.. 뭐지.. 따.. 따뜻해..
별 말도 아니었는데.. 책에서, tv에서, 친구들의 생일 축하 문자 메시지에서 숱하게 들어오던 평범한 그 말을 전화기 너머 우리 엄마의 목소리로 듣다니.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말이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일반적인 K-가족이라 사랑하고 행복하라는 말 따위는 할 줄 모르는 민족이었고 글로도 못 전할 닭살스러운 애정표현에 어색한 사람들이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몸을 베베 꼬게 되는 이상한 말. 그런데 지문과 대사가 나란히 배열된 글을 읽고 그대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나의 엄마가 먼 곳에 서 있는 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내.”
마음이 아릿하게 떨려왔다. 낯설고 쓸쓸한 거리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여기에 적응하려고 안정감을 찾고 있는 그때, 엄마의 말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에워쌌다. 목소리만으로도 엄마는 내 옆에 있었다.
행복하라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모른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의욕 없이 주눅 들어 있던 나를 살렸다. 그 마법 같은 말 한마디에 비로소 런던에서 나의 삶이 시작됐다. 든든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행복할 것 같았고 영어를 잘 하든 못하든,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든 못 사귀든 나는 그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레 짐작하건대 그때 런던으로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엄마에게 행복이란 단어는 못 들었을 것이다. 일상애서 가족에게 문학적 표현을 하는 일은 참 쑥스러우니까. 친한 친구,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는 잘도 하는 그토록 달콤한 말이 부모님에게만은 날 서고 투박한 말로 대체된다. 아마 우리 가족은 몇 개 되지 않는 말만 되풀이하며 십여 년을 더 살았을 것이다. 늘 서로에게 같은 말을 하고 예상되는 대답에 살짝 실망하면서.
그 이후로 엄마에게 두 번 다시 행복한 하루를 보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내가 힘들 때 되살아난다. 그리곤 다시 나를 살린다.
결혼 초 남편은 살짝 술에 취해 내게 물었다.
“내가 장모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자기한테 원빈 닮았다고 해서?”
“아니, 폐백 할 때 어머님이 한 말씀 때문이야.”
맞네. 엄마는 뜬금없이 그날에도 연극대사 같은 말을 했다.
“내 사위가 되어줘서 고마워.”
결혼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남편이 한번 상기시켜 주니 이 또한 참 따뜻한 말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사람을 또 이렇게 뜨끈하게 만든다.
다행스럽게도 이 말은 영상으로 녹화되어 있다. 아마 나중에 엄마가 옆에 없더라도 남편은 이 장면을 보면서 금세 엄마를 마음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럽다. 내가 들었던 행복해 말은 무방비 상태에서 소나기처럼 갑자기 쏟아진 말이어서 오직 내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고 이마저도 점점 엄마의 음성이 옅어지고 있다. 오직 ‘행복한 하루 보내’ 문장만 글자의 형태로 마음에 남아있다.
엄마에게 다시 한번 소나기처럼 들을 수 있을까.
나를 살리고 또 일으키는 다정한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