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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r 25. 2018

주부 이력서, 정직한 자기 탐색의 시간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전업주부를 하고자 이력서를 써본 적이 있나 생각해 봅니다. 결혼을 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막막한 해외에서의 첫 신혼살림은 주부보다는 어학연수생의 마음으로 가볍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마냥 부모님 곁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자유로움이 훨씬 피부에 와 닿는 시간이었지요.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살림살이를 들이고 관리비 고지서를 꼼꼼히 뜯어보니 조금씩 주부의 역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전기료 몇 백 원을 아끼고자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면서도 신혼 초는 참 재밌던 것 같아요. 나의 주방과 거실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늘 바라보며 사는 주부의 삶은 참 즐거웠거든요. 비록 간간히 외벌이 남편에 대한 미안함, 이러고 있어도 되나의 자괴감이 파도의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 갔다 했지만 그것에 비해 주부의 전체적인 삶은 참으로 풍요롭고 평온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 서툴렀던 집안일과 요리가 손에 익고 나니 스멀스멀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아무리 쥐어짜도 답이 없는 한계적인 생활비,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그 허울만 동경할 뿐 막상 소유의 삶으로 그득한 일상, 이런 모순적이고도 어두운 생각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고도 고맙게도 이것들은 평온한 날들에 적당한 유연제가 되어 줍니다.


바로 '자기 탐색의 시간'을 더욱 짙게 만들어 주거든요.

입사 할때 꼭 썼던 자기소개서. 저를 표현했던 유일한 이력서였지만, 막상 취업이 되면 이력서 속의 희망찬 저는 없고 그 회사의 부속품이 되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지시하는 대로 적당히 일만 수행할 수 있다면 월급을 받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주부의 이력서에 넣을 자기 탐색 시간은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집 직장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만, 막상 살림의 허무함을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날들을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지시를 내리지도, 시키지도 않는 고요한 일상에서 어떤 것들로 주부의 시간을 만들지는 오로지 저의 몫이 됩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려 보자면, 저는 일단 '제가 좋아하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책을 좋아해 도서관에 다니고 거기서 열린 독서논술교육 프로그램을 들어 요즘 교육 트렌드를 익혔습니다. 아직 아이가 없어 바로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추후 내 아이에게 어떤 독서 습관을 물려줄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는데요. 임경선 작가와 은유 작가, 정철 작가 등 주로 언어를 다루는 작가의 강연은 가서 듣는 것만으로 마치 다시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고, 공부를 하는 심정으로 무언가를 확실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은유 작가의 글쓰기 강연을 계기로 이렇게 브런치에서 작가로 활동을 하기도 했지요 ^^;





이렇게 활동 아닌 활동을 한 후에 느낀 것들을 블로그에 짤막하게 기록하니 운 좋게 소설, 에세이 등의 서평단으로 참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는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간간히 독립 영화를 보러 서울에 나가기도 합니다. 한적한 오후 3시 메가박스에서 보는 '조용한 열정'은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대한극장의 '여자의 일생'은 삶에 대한 섬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btv에서 제공하는 무료 영화는 또 얼마나 다양하고 재밌는지요?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주부라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마 주부의 탐색 시간이 아니었다면 [조직에서 살아남기, 여성으로 승진하기, 무조건 회사에서 버티기] 같은 목적을 두고 억지로 뭔가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것들은 결과도 좋지 않았겠지요.


물론 자기 계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수많은 직장인 분들을 참으로 존경합니다. 다만 제가 못나서 그 경쟁에 끼지도 못하고 도태된 것뿐이죠. 그렇다고 주부로서의 인생에서도 도태될 순 없습니다. 주변에 경쟁자가 없으니 저처럼 소심한 사람에게는 오직 저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셈입니다.




"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었던 문장,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쓴 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일상을 정성 들여,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달라질 수 없는 곳이기에 거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이 일상을 정성 들여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밖에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사막에 풀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






결혼을 하고 얻게 된 이 탐색의 결과물들은 저를 더욱 저답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들이 '집에서 심심하지 않아?'라고 비꼬듯 묻는다면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아니, 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가'라고요. 전업주부라고 시간이 남는 줄 아나 본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못을 박습니다!!


오후 영화를 보고 저녁을 차리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와도 그 걸음이 마냥 가볍고 기쁩니다. 물론 저녁은 파송송 썬 계란 라면을 신랑과 함께 먹더라도 저의 좋은 에너지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다면 아마 신랑도 행복할 것입니다. (물론 신랑의 의견은 묻지 않기로 합니다 ^^;;)


위의 글처럼 저의 소소한 행동은 세상을 움직이는 일에 있어 정말 티끌의 티끌도 안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사람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모습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저의 삶에 있어서 이런 시간들을 1분, 1시간씩 모으는 일은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살림의 허무함 들을 기꺼이 이겨내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직장인 저는 '시간을 돈과 맞바꾼' 인생이었지만, 주부인 저는 '돈을 시간과 맞바꾼'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삶이 더 좋았냐고 물으신다면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직장인 저의 모습도 분명 사랑했고, 그 시절의 제가 자랑스럽기도 했으니까요. 스스로 버는 돈으로 생활을 유지시키는 일은 어떤 가치보다 높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탐색의 시간을 그냥 저버리지 않고 오늘도 사막에 풀씨를 뿌리듯 정성스레 저의 이력서 한 줄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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