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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y 01. 2018

청소하는 늙은 노동자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때 오락실 사장님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하시다 돌아가신 뒤에도 가까운 곳에 집을 얻고 오락실 한 구석 자리에 앉아 동전을 바꿔주셨지요. 그때는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테트리스 게임도 하고, 할머니가 식사를 하러 가실 때면 자리에 앉아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주기도 했습니다. 어린 눈에는 마냥 할머니가 좋아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자몸으로 오락실을 지킨다는 건 언제 나쁜 학생들이 돈을 훔칠지 모르는 아슬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좀 더 커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할머니는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대학교 청소 일을 하셨죠. 무릎도 안 좋은 할머니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길 바랐지만 그 누구 하나 할머니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용돈도 벌고 집에 혼자 있으면 더욱 몸이 안 좋다며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제 삶이 더 바쁘고 할머니의 인생까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언제부턴가 저희 대학교에서 청소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외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청소하시는 분 옆 쓰레기통에 툭툭 쓰레기를 던지는 학생들, 화장실 휴지를 마구잡이로 버리는 학생들을 보며 왜 청소하는 일을 하찮게 보는 시선들에서 할머니가 겹쳐 보였을까요?


그때부터 어디서든 청소하시는 분들을 보면 다르게 대하게 됩니다. 특히 학교와 직장에서 마주치는 청소 아주머니들께는 꼬박 인사를 하고, 이것들을 버려도 되는지 공손히 물어오시는 그분들께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착해서이긴 보다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무거운 짐을 낑낑대고 걷는 할머니와 같이 들어주는 건 바라지도 않고 다만 뒤에서 흉보지 않기를, 빨리 안 간다고 투덜거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꾸리는 할머니가 어린 학생들이 멋모르고 하는 소리에 상처받을 일이 없었으면 했거든요. 여기서 행하는 저의 작은 선함이 누군가 조그만 선의로 할머니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먼지는 매일 오는 손님


청소는 하층 직업에 속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집안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래서 반대로 이야기하면 청소는 경제적 가치에 톡톡히 부합하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청소를 해야만 주변 자리가 깨끗해지고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고 시간이 없으면 청소하는 사람을 사면 되고, 돈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내가 하면 되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면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야 합니다. 아마 엄마나 아내가 해주겠죠?


결혼하기 전엔 청소가 이렇게 귀찮고 힘든 일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속 시원한 일인 줄도 몰랐죠. 엄마가 왜 매일 청소를 하는지, 하면서도 왜 힘들다고 하는지. 힘들면 안 하면 되는데, 또 꾸역꾸역 하는 이유를 도통 몰랐습니다. (하. 적으면서도 정말 철부지 없는 딸이었네요.)

엄마에게 청소는 하나의 수행이고, 경제적 일이고, 가족을 위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저희 가족이 밖에서 깔끔하고 품위 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엄마가 집에서 노력한 일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이제는 제가 그런 마음으로 하고 있거든요. 꼬깃꼬깃한 셔츠보단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출근시키고 싶은 마음, 흙투성이 운동화보단 깨끗한 신발을 신기고 싶은 마음. 잘 정돈된 집에서 푹 쉬길 바라는 진심이 저를 일으키고 청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에 저를 수행하는 하나의 일과이기도 합니다. 분명 청소와 살림은 몰입도를 좋게 하여 스트레스를 통제하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내뿜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깨끗함이 성취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복을 통해 제가 조금씩 단단해짐을 느끼며 삶에 대한 관대함도 조금씩 커지고 있습니다. 분명 지루하고 따분해 보이는 일을 계속해서 이뤄낸 것들입니다.




[청소 끝에 철학]


무언가 지속된다는 것은 거대한 힘의 증거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에도 많은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다. 수적천석이라 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은 바위도 뚫는다. 그런 일상을 위한 에너지는 다시 일상에서 얻는다. 다음 식사를 위한 그릇이 필요하기에 설거지를 하고, 활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주변을 청소하며, 마당을 꾸미기 위해 꽃에 물을 준다. 이를 반복하며 얻는 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에너지다.




동트는 아침, 청소하기 딱 좋은 시간



마음이 복잡하고 귀찮으면 제일 먼저 몸이 알아봅니다. 아무것도 하고 싫고 1mm도 움직이기 싫은 상태가 됩니다. 자꾸만 엉덩이가 무거워지면서 어느덧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찮게 여겼던 청소가 제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억지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부터 개고 한 걸음씩 걸어 보면 내가 스스로 찾아 할 수 있는 청소 거리가 있습니다. 어제 마시다 남은 커피잔을 설거지 통에 넣고, 화장대 옆에 버려진 양말을 허리 숙여 줍습니다. 찬찬히 나의 영역을 더듬어 걷다 보면 과거의 내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는 지금의 내가 보입니다. 청소는 그렇게 시작하는 일입니다.

누구나 평범한 일상을 꿈꾸고 이루기 쉬운 듯 말하지만 일상을 유지한다는 건 내 몸을 이용해 평온한 정신이 깃들게 하는 청소의 반복이기도 할 것입니다. 돈을 벌고자 수행하는 마음으로 할머니가 학교를 그렇게 열심히 쓸으셨듯, 저도 제 딴의 목표를 위해 이곳을 부지런히 쓸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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