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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y 15. 2018

만약 그 날의 초라함이 없었더라면...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초라함'을 제목으로 적고 한참을 들여다 봅니다. 그 날이 언제였는지 그때의 공기가 어땠고, 나는 무슨 생각으로 있었는지 아직도 생생합니다. 대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저는 잡지 교육원에 들어 갑니다. 소정의 금액을 받으며 잡지에 대한 전반적 이해와 연계된 곳에 취업을 할 수 있는 기관이었습니다.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보단 뭔가 멋져 보이는 잡지 에디터의 꿈만으로 녹록치 않았던 취준생의 기간을 버틴 날들이었습니다. 워낙에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던 저는 그쪽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어두운 시간을 보내곤 했지요.


정규 교육 기간이 끝나고 코엑스에서 열리는 취업 박람회를 통해 면접을 봐야 했습니다. 첫 면접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고 몇 군데 마음에 드는 부스로 들어가 몇 마디를 주고 받고 끝이 났습니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죠. 솔직히 한 두군데에서는 연락이 올 줄 알았습니다. 같이 어울려 다니던 언니와 동생들은 메이저급의 잡지 회사에 붙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기 때문이었죠. 취업 현황이 얼추 윤곽을 잡혀가던 중, 저는 그 어디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취업을 담당하던 선생님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에게 ‘빵표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면전에서는 허허허 사람 좋게 그저 웃고 말았지만, 그 사무실 문을 나오는 순간엔 어찌나 얼굴이 화끈하던지요.


겨우 겨우 붙들고 있던 취직 동아줄 마저 끊기자 저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채 가슴만 두근두근 거렸습니다. 난 또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결국 집에 가는 영등포 역 화장실에서 소리 없이 울고야 말았습니다. 복잡하고 외로운 그 순간, 어디로든 숨고 싶었거든요. 다들 웃음 띤 얼굴로 서로의 취업을 축하해 줄때, 저는 거기서 억지로 상황에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멍한 얼굴로 입만 웃고 있다 고개를 홱 돌려 나왔을 뿐입니다.


화장실에서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부모님께 죄송해서 어쩌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의 막막한 생각들만 리플레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울고 지하철에 몸을 맡겨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날의 쓸쓸했던 공기, 혼자라는 외로움이 한꺼번에 덮쳐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제일 초라했던 날이었지요.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그때의 추웠던 제가 온 몸으로 느껴집니다. 그날 들었던 투애니원의 노래가 더해지면 제 주변 풍경은 영등포역 화장실로 바뀌기도 하지요.

빵표 아가씨의 슬픔은 저만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 한 명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죠. 초라함은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게 비록 10년 전의 저라 할지라도.


그런데 인생이 신기한게, 그 기억이 때때로 저에게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거지같고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초라했던 그 날의 저를 생각하면 묘하게 위로가 되곤 합니다. 그 순간을 견디고 어떻게든 지금 이렇게 있는 제가 좀 나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그 날만큼 힘들고 외로워? 화장실에 혼자 쭈그려 울만큼 괴로워?’ 이런 마음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면 툭툭 털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초라했던 날이 저 날뿐은 아닙니다. 런던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플랏 메이트 집 거실에 혼자 남아 미드를 보며 나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아무도 내가 가는 걸 신경 쓰지 않는구나 쓸쓸했죠.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제 생일에 혼자 일하고 있을 때, 친구 애인과 함께 만나는 날 그 둘의 테이블 아래 폭 포개진 손을 바라볼 때도 참 외롭고 초라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소한 순간일지라도  잠깐의 감정이 가슴 깊이 박혀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들이죠.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는 어떤 일엔 무던히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홀로 보내는 생일을 기도하며 조용히 보내도 충만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세상의 중심을 나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초라함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가장 초라했던 순간을 버텨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상이 별로 어렵지 않게 됩니다. 굉장히 화가 나고 짜증 나는 날이 있겠지만 잠시면 사라집니다. 전업주부가 남편 등골브레이커라고 농담하는 친구가 순간 섭섭하겠지만 제 인생에서 그토록 중요하지 않은 말이란 걸 알게 됩니다. 상황은 바뀌고 인간도 변하기 마련인걸 이제는 아는겁니다.


전업주부, 외벌이로 살다보니 몇백원을 아끼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가까운 세탁소의 드라이클리닝은 4천원이고 발품을 팔아 좀 더 멀리 걸어가야 하는 세탁소가 3천원이라면 당연히 산책 겸 먼 세탁소를 방문합니다. 아 고작 천원 아끼겠다고? 네 맞습니다. 천원이면 편의점에서 제가 좋아하는 커피 우유 하나를 사 먹을 수 있는 돈인데 그거 아껴 보겠다고 남들이 찌질하고 없어 보인다 생각해도 갑니다. 아마 단 500원 차이였어도 갔을 거에요. 버스 한 번 타는데 500원은 소중하니까요.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얼마나 부자되겠다고 비꼬는 사람들에게 속시원히 던져줄 수 있는 말은 없지만 초라하게 보이는 이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초라함은 슬픔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고 그냥 그 때의 감정일뿐. 언젠가 그 초라함이 초연함으로 바뀌어 미래의 저를 위로해 줄거란걸, 믿거든요.




[시모어타인스의 말]


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그리고 그걸 견뎌내는 내 능력에 자신감을 되찾은거죠. 대형 콘서트 홀에서 긴장감을 견뎌내고 연주한 경험이 있거든요. 한 번 그러고 나면 마치 어디선가 든든한 팔이 나를 안아서 다음 도전으로 데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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