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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r 11. 2018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타인의 일상, 효리네 민박처럼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살림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것만큼 참 티 안나는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먼지는 가만히 숨만 쉬어도 쌓이고, 떨어진 휴지는 제가 허리 숙여 줍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서 그대로 머무르기만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공짜가 없듯, 저의 집은 제가 움직이는 딱 그만큼 일상이 깨끗하게 정돈됩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 출근용 주스를 챙기고 어젯밤 밀려 두었던 그릇을 정리하는 게 싫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 않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마주할 때마다 암시를 걸게 됩니다.


'나는 민박집주인이다. 손님의 아침을 위해 주방 문을 열고 주스를 갈아야 한다. 가게의 시작을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한다'라고 속으로 연극을 하는 것이죠.


반복적인 노동일 수밖에 없는 살림이 지겨울 때 혼자 이런 연극은 저를 일으키는데 약간의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든 저의 리듬을 꺼뜨리지 않고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일상도 멀리서 보면 참 평화롭습니다.



요즘 '효리네 민박'을 보면 멀리서 바라보는 타인의 일상은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 저의 일상을 객관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TV를 마음속에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저의 모습이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부지런하고 푸근한 민박집 젊은 새댁의 모습이 겹치기도 합니다.


익숙한 걸음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수건을 개며, 물통에 가득 생수를 채우는 살림은 ‘작아도 진짜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살림은 우리의 삶 근간을 지탱하는 가장 밑바닥의 노동이자 노력이므로 누구도 몰라준다 한들 집안의 주인인 주부는 일상의 지속성을 위해 매일 조금씩이라도 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사람에게는 보람이란 게 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 가운데 조금은 마음이 통하는 일상이 기다리는.

그런 작은 일로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



가끔, 혹은 며칠 동안 살림이 지루하고 지겨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빨래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대로, 삼시 세 끼를 인스턴트로 때울 때도 있습니다.


어쩐지 내가 좋아해야 하고, 잘 해야 할 것만 같은 살림이 미워진 일을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것들을 다시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오길 기다립니다.


컨셉진, 그리고 나의 애장품


며칠 전 제가 좋아하는 잡지에서 '나의 애장품에 관하여'라는 독자의 짧은 원고를 모집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나에게 애장품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단 몇 줄의 '엄마의 혼수 시계'를 적어 보냈습니다.


저는 여태껏 엄마가 손목시계를 찼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간단한 팔찌 정도는 기분전환으로 하셨던 것 같은데 아빠에게 혼수 선물로 손목시계를 받으셨다니.. 뭔가 낯선 엄마의 모습입니다.

엄마에게 손목시계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늘 행주로 주방의 상/하부장을 닦고 있거나, 물걸레를 손으로 짜서 바닥을 닦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손목시계는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늘 물과 함께인 삶에서 시계는 부담스럽기만 한 그런 존재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근 30년을 보석함에 넣어 두었다 딸이 결혼할 때 물려주신 그 손목시계.


지금은 제 손목에 딱 들어앉아 장을 보러 갈 때, 간단한 집 정리 정돈을 할 때, 설거지 할 때 고무장갑 안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엄마의 살림과 저의 살림은 결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시계에 물이 닿을까 아까워하던 엄마와는 달리 그냥 어떤 때라도 차고 싶은 저는 그냥 주야장천 제 기분에 따라 적절한 패션 소품이 되기도 하고, 가만히 보며 내 나이의 엄마 모습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살림은, 현실에 판타지 요소를 조금씩 넣어 주고 싶은 것이니까요.


우리는 엄마와 딸로 만났지만, 결국은 저 멀리 주부의 삶으로 녹아든 길을 나란히 걷는 동지이기도 합니다.


엄마에게 보람은 박박 닦은 마루를 보며 그 날의 한숨을 잊는 일이었고, 저의 보람은 때마다 다른 살림의 날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기록하며 하루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어떤 일상에 마음이 통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던 일들로 살아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조금씩 제 어딘가에 채워지면 ‘작아도 진짜인 일인 살림’이 정말 나의 일인가 싶을 때, 한 번쯤은 일상의 무의미에 대한 의심이 옅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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