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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Feb 17. 2018

주부가 숨기 좋은 공간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결혼 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무척 하고 싶었습니다. 30평 남짓의 집엔 제 방도 따로 있고 퇴근 후 돌아와도 부모님과 살갑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콕 틀어박혀 있었던 저인데 왜 독립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마 인간의 본능이 점점 올라왔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어느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꿈꾸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열망이 있고, 수중에 돈이 조금 있다면 전혀 이루지 못할 꿈도 아니었지요. 물론 제가 돈이 많아 그런 꿈을 쉽게 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매월 받는 쥐꼬리만도 못할 월급으론 그저 고시방 하나를 그럭저럭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궁리만 했더랍니다.


한창 엄마와 투닥거릴 시간이 많았던 시간. 부모님께 조심스레 독립을 해보고 싶다 말씀드렸고, 그렇게 일이 진행되나 했더니 덜컥 결혼이란 독립을 해버렸습니다.

이걸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하핫


그래도 참 행복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벽지로 방과 거실을 꾸미고, 맘에 드는 가전들로 소박하게 집 안의 자리들을 찾아 주었습니다. 소소한 소품을 고를 때도 이리저리 가격을 비교하는 일이 참 즐거웠던 살림의 업무였지요.


노트북 하나면 글을 쓸 준비는 거의 완성됩니다.


그렇게 차츰 저희 부부만의 색깔이 입혀진 공간에 저의 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살림의 의미가 무뎌질 때, 부부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 같을 때, 무엇인가 어깨를 한없이 짓누를 때 도망갈 곳이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큰 메모장에 육두문자를 시원하게 날려도 보고, 위로가 되는 책을 필사하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물론 서재도 있었지만 여름과 겨울 냉방비와 난방비가 아까워 에어컨도, 보일러도 틀지 못해 그저 허울 좋은 공간이 되어 버리고 말아 다른 장소를 열심히 찾아야 했습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곳을 말이죠.


그러던 중 우연하게 가계부를 적기 시작하며 엉덩이를 붙인 곳이 지금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름하야, 살림하는 여자가 글쓰기 가장 좋은 공간.

부엌이었습니다.


물론 자질구레한 용품이 눈에 곳곳 보이는 매우 현실적인 공간이었지만 제 손길이 가장 많이 닿고, 늘 깨끗하게 신경 쓰고 싶은 그런 공간은 저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좀 더 견고히 만들 수 있도록 에너지를 넣어주는 곳이었습니다.


아침 집안 정리를 마치고 간단한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내려 오전 11시 정도가 되면 라디오 주파수 93.9를 맞춥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잔잔한 목소리의 DJ와 함께 시작되면 차분한 기분이 들면서 글을 쓰는 최적의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뭘 대단한 걸 쓰느냐고요?

별 것 아닙니다. 블로그에 일상을 끄적이기도 하고, 가계부에 지출 항목을 적기도 하고, 개인 다이어리에 중요 일정과 블로그에도 올리기 뭣한 소소한 일들을 나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진과 글감이 좀 더 풍성하게 모아지면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하고요.


정말 별 것 없지요? ^^

그러나, 이런 일들이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들이라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미드도 보고, 멍도 때리다 보면 저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어떤 우울감이나 좌절감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긍정적 에너지가 다시 채워지는 것이지요.


저는 무척 내향적인 사람이라 혼자만의 공간에서 얻는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기 때문에 글 쓰는 공간은 꼭 필요한 저만의 은신처이기도 합니다.


아일랜드 한 구석 자리는 저의 지정석입니다.



"

[글 쓰는 여자의 공간] 그 어디든, 삶을 위해 글을 쓴 여성 작가들                                                                                                                                                                                                                         


 "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끓입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지요. 그러고는 동이 트기를 기다립니다."


글 쓰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건 이 새벽 의식을 거친 다음이었다. 모리슨은, 작가에겐 언제, 어떤 조건에서 가장 창의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음악이 있는 공간이 좋은지, 그냥 조용한 환경이 좋은지, 아니면 차라리 떠들썩한 환경이 좋은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리슨 자신은 전화가 걸려오지 않고 이동할 필요도 없는 공간에서 커다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길 꿈꾼다.        

"



영화 '실비아'의 한 장면. 엄마와 아내, 그리고 시인이었던 여성의 이야기


지독히도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살아야 했던 글 쓰는 여성들은 저마다 공간을 찾기 위해 투쟁하거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뒤의 시간을 활용해야만 했습니다. 좁고 허름한 식탁, 그마저 허락되지 않으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순간도 있었죠. 그곳에서 탄생한 수많은 문장들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기꺼이 살아남은 것이죠.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 저는 얼마나 좋은 시대와 환경에서 편하게 글을 쓰고 있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비록 그녀들처럼 빛나고 번쩍이는 글을 창조할 수는 없지만 저를 치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글을 쓰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때론 충전소처럼, 어느 때는 은신처로, 또 어떨 때는 쉬어가는 장소처럼 그렇게 부엌 아일랜드 한편은 저만의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제가 좋아하는 집에서 더욱 좋아하는 공간이 된 것이지요.


20대엔 화려한 직업과 일을 하는 근사한 커리어 우먼을 꿈꿨고, 지금도 화려한 무대에 서는 꿈을 꿔보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림하고 적당히 쉬면서 제 책상에 앉아 이것저것 소소한 일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크고 중요한 일을 해서 성취감을 맛보아야만 그것이 행복이고 성공인가요?

작은 날들을 나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보내는 일이 더욱 행복한 일이지요.

눈물 쏙 빼며 양파를 다듬고 그 양파로 나만의 레시피로 적당한 볶음 요리를 만들어 내는 하루의 시간이야 말로 충만한 일들로 채워졌다 생각합니다.


그리곤 작은 사진 하나를 찍어 글을 쓰며 일상의 한 부분을 기록한다면, 그것도 충만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행하게 하는 저만의 공간.


이거면 충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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