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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y 20. 2019

돈을 벌고 사치하는 몇 개의 것들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전업주부에서 맞벌이 주부가 된 지금, 무엇이 좋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당연히~!라는 전제는 달지 못하고 둘 다 장점이 있다고 얼버무리거나, 정서적 충만감이 컸던 전업주부의 시절을 이야기할 때가 좀 더 많긴 하지만 전혀 부정하지 못하는 건, 돈을 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나를 위해 사는 몇 가지 물건을 조심스럽게 얘기할 때다.

 

결혼 초 외벌이 일때 커튼 다는 돈이 아까워 한 겨울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을 그냥 맞고 잔 적이 있다. 정말 욕을 얼마나 하면서 잤는지.. 그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폭풍 검색했더랬다. 어쩔 수 없이 첫 살림에 들어가는 크고 작은 돈들은 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위한 것들에게 폭이 좁아졌다. 아울렛에 가서 예쁜 봄 원피스, 흰 셔츠가 보여도 '어디 입고 갈 데도 없는데 뭐'하고 내려놓거나 목걸이나 귀걸이, 팔찌 같은 액세서리는 정말 무난하고 작은 것들 몇 개, 화장품도 선크림 정도만 신경 썼다. 다행히 남편 회사 덕분에 가끔 쿠션을 거저 얻을 때가 있어서 있으면 있는 것들로, 없으면 어머님이 주신 것, 아니면 정말 필요에 의해 산 것들이 전부였다. 정말 사고 싶지만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며 못 산 적은 없으나 어쨌든 나를 위해 사는 것들에는 철저한 '쓰임'이 있는가를 몇 번이나 되뇌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돈을 벌고 몇 가지 사치 부리는 게 생겼다. 바로 쿠션 팩트다. 개인적으로 화장에서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선크림과 클렌징인데 돈을 크게 쓰는 쪽은 피부 결을 완성시키는 쿠션이다. 나의 경우 파운데이션 같은 진한 느낌의 텍스처는 선호하지 않고 얇고 투명하게, 그리고 촉촉이 잘 발리는 쿠션을 좋아한다. 바쁜 시간 퍼프로 팡팡 몇 번 치면 대충 피부결이 좋아지는 효율성도 만족한다. 그동안 아이오페, AGE20's, VT, 바닐라코, 헤라 쿠션을 써봤지만 그중에서 VT가 제일 좋았고, 이번에 정착한 것은 랑콤이다. 그렇다. 바로 내가 사치 부리는 것 중 1호가 이 랑콤 팩트다. 친구 추천으로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 백화점에 가서 깜짝 놀랐다. 무려 리필 가격이 7만 원대.. 친구에게 케이스를 얻어 리필만 샀는데도 그동안 사용했던 쿠션 가격에 비해 두 배 이상이었고 심지어 리필 딸랑 1개 가격이었다. 당당하게 달라고 말해 놓고 나중에 올게요 말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써보니 내게 너무 잘 맞았다. 커버력은 높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얼굴을 화사하게 만들고 물광 피부로 살짝 표현하는, 무엇보다 내 얼굴에 전체적으로 녹아드는 기분. 소량만 찍어 발라도 충분해서 그나마 가격에 대한 고민이 줄었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사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이 팩트.


평소 화장을 진하게 하는 편이 아니어서 피부 표현에 공을 들이기로 했다. 마스카라도 안 하고, 섀도우는 아주 살짝, 볼터치 생략, 입술은 올리브영에서 1만 안 되는 세일 품목으로 나에게 잘 맞는 오렌지 컬러를 쓰니 피부결 정돈에 큰 투자를 하기로 한 거다. 깨끗하고 투명한 피부까지는 아니지만 타인에게 맑고 반듯한 얼굴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 씀인데, 물론 이 팩트를 쓴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다 그렇게 보진 않겠지만 똥 손인 내가 화장을 하는 최대의 목표이자 노력이라고 해두자.


백화점에서 처음 산 팩트는 작년 겨울부터 쓰기 시작해 뒷면까지 들춰가며 아직까지 잘 쓰고 있다. 혹시 몰라 저번 상해에 갔을 때 면세점 쿠폰으로 5만 원 초반대로 하나 더 사두기도 했으니 아마 올해에는 충분히 날 듯하다.

월급이 없었다면 아마 꿈도 못 꿨을 나의 랑콤 팩트. 돈을 버니 비싼 쿠션을 쓸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늘 어디 갈데없단 핑계 하나로 내게 소홀했었는데...   


다음으로는 향수다. 이건 좀 의외의 품목인데 결혼하고 나서 향수 좋아하고 잘 뿌리는 남편을 만나 변한 케이스다. 원래 남에게서 나는 향수 향도 좋아하지 않아 금방 재채기를 하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내게 조말론은 특별하다. 코스트코에서 향수 코너가 있어 몇 가지 시향을 하다 이거다 싶어 가져온 '우드 세이지 앤 시 솔트'는 잔향이 숲 느낌이어서 좋아라 한다. 약간은 중성적이어서 남편과 함께 공용으로 칙칙 뿌리는데 기분 전환하기에 참 좋다. 향이 주는 기운이랄까? 아무 생각 없는 출근길에서 살짝살짝 이 향을 맡으면 금방 기분이 좋아지고, 오후 2시쯤 나른한 사무실 공간에 문득 이 향이 코끝을 스치면 짜증도 수그러든다. 너무 좋아서 누군가 옆을 지날 때 이 그 사람이 이 향을 맡아보았음 하는 때도 있다. 아마 나에 대해 기분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은 바람이기도 할 거다. 가끔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날 때 한 순간 아주 좋은 향이 어디에선가 불어와 주변을 기웃거려 볼 때가 있다. 분명 어떤 사람의 상쾌한 향수였을 것 같은데 좋은 배려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 내게 향수는 단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용도이기보단 나의 기분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도 쓰인다.


지금도 남편과 나는 또 다른 향수를 두고 가격을 고심한다. 사고 싶지만 비싼 그 향을 어떻게 얻을 것인지. 백화점 세일 기간, 쿠폰, 면세점 찬스, 인터넷 최저가 등 정보를 모으고 탐색하며 궁리 중이다. 이번 달은 자동차 세금에 헬스도 끊어 백만 원 대가 훅 나가는 달임에도 하루의 기분을 끌어올리는 그 작은 몇 방울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이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사치의 끝판왕. 원래 나는 손목시계를 좋아하는데, 물 닿을 리 많은 살림의 시간에서도 시계는 종종 쇼핑 리스트 중 하나였고,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건 동그란 금색 프레임의 카시오 검정 가죽 시계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학생 수능 시계로도 잘 알려져 있을 만큼 클래식과 정석이란 느낌이 잘 맞아떨어졌다.  전에도 브런치에 얘기한 적 있을 만큼 손목시계는 내가 닮고 싶은 클래식하고 이지적인 이미지에 잘 부합되는 아이템이고, 실제로 시계를 차면 자존감이 커지는 기분도 느낀다.

그러니 돈을 다시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도 시계에 눈길이 간 건 당연했다. 그래서 첫 월급을 타서 로이드의 갈색 가죽 시계도 사고, 온라인숍에서 싸고 이쁜 시계도 샀다. 얼마간 잘 차고 다니다가 최근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밤낮 가리지 않고 검색하게 만든 시계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까르띠에 탱크 솔로 시계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도 안다. 이건 많이 심했단 걸. 내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한 달 치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도 스트랩 한 줄도 살 수 없는 이 시계를 꿈꾸는지. (사실 꿈에서는 몇 번 나옴..) 처음에는 그냥 구경만 하자 싶어 연예인이 찬 사진, 일반 사람들이 구매한 후기, 해외 대행 구매 사이트에 문의도 괜히 넣어보고 그냥 확 살까? 진지하게 마음도 먹었지만 아직 아니라는 판단 하에 비슷한 스타일의 다른 시계를 샀다. 사각 프레임에 검정 스트랩이 주는 심플함이 아주 좋다.


그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상징이 지금 내게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오랜만에 시작한 회사 생활에서 모르는 일 투성, 너무 조용해 존재감이 없는 듯한 불안함의 모든 감정을 끌어안고 일할 때면 마음보단 내가 좋아하는 물건에 기대 하루를 버텨내고 싶은 날이 있다. 아이디어가 없을 때 좋아하는 시계를 만지작 거려 보고 불편한 동료에게 전화 걸어 업무를 요청할 땐 숨 한 번 크게 들이켜 좋아하는 향을 품고 내선 번호를 누른다.

물건이 주는 상징을 내 안에 담는 일. 소유가 주는 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좋은 기분이 모이면 내 감정이 되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 내 안의 자신감을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그저 딱 하나, 내 마음에 드느냐. 차거나 입거나 가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지느냐. 그것 하나로 충분한 소유의 행복이다. 그래서 내게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있고, 다른 의미로 ‘소유해서 확실한 행복’도 있다. 요즘 하도 미니멀라이프다 뭐다 해서 건강한 소비만을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어쨌든 기분 좋은 나만의 사치는 단순하고 단단하게 나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인 게분명하다.




[태도의 말들 중, 시인 서한영 교]


아이와 함께 '시인의 감성과 시민의 감각을 지니고 시시한 일상을 잘 가꾸며 사는 사람'으로 커 나가고 싶어요. 무엇보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욕심보다 요리나 청소 같은 삶의 작은 단위부터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살림을 하면서 나는 더 단단해졌고 삶의 작은 단위가 건강해야 내 마음도 덩달아 건강해짐을 배웠다. 이 시간 동안 절제, 겸허, 인내와 늘 고민하며 좀 더 나은 방법으로 성장하고 싶었고, 세상에 거저 얻는 대가는 없다는 것 또한 몸으로 깨우쳤다. 거기에 하나 더 알게 된 것을 얹자면 소유는 나쁜 게 아니라는 것. 남들 눈엔 비싼 돈 주고 왜 그걸 사냐 싶은 것들이 시시한 일상을 잘 가꾸고 내 밑바닥을 끌어올릴 무언가가 충분히 될 수 있다.


내 친구 하나는 우울한 고민이 있을 때마다 네일 케어를 받는다. 친구나 가족에게 털어놓을 때 보다 말갛게 정돈된 손톱을 보면 마음도 스르르 정리된다고.


이처럼 소비하는 확실한 행복의 좋은 예로 우리의 축 처진 기분을 건강한 방법으로 끌어 올리기 바란다면, 소유를 아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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