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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ug 11. 2019

지나치게 외로울 때 꺼내 보는 그림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모호하고 희미한 문장보다 한 점의 그림이 위로하는 힘은 세다.”


 처음 명화라고 하는 그림에 빠진 건 미켈란젤로 덕분이었다. 유럽 여행 중 바티칸 투어를 신청했는데 그림을 설명하던 해설가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미켈란젤로의 영혼을 갈아 넣은 작품을 ‘그냥 그림’으로 흘려보낼 뻔했다. 이야기를 알고 보는 작품 하나하나는 예술가가 왜 고독하고 위대한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된 계기였는데, 미켈란젤로가 내게 온 건 순전히 그의 ‘우직함’ 때문이었다.


 미묘한 관계에 있었던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그림은 천장 밑에 앉아 고개만 들어 그려야 했던 엄청난 수고와 정성이 집약된 작품이다. 시력을 잃고 몸 여러 곳에 병을 남긴 고된 작업이었지만 결국 4년 만에 완성한 대작은,  본업인 조각을 등지고 자꾸 그림을 그릴 것을 명령한 교황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늘 기도하며 신에 닿는 진심 하나만 가지고 그 대업을 이룬 미켈란젤로가 덕부에 천재형 예술가의 능력보다 노력형 예술가가 보여준 묵직한 인내심, 곧은 그의 태도가 훨씬 멋져 보였다.


 그 단 하루, 고작 몇 시간의 바티칸 투어는 시공간을 넘어 우리를 연결시켰고 마치 단단한 알맹이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준 것처럼 그의 성실함을 생생하게 전해왔다.


 한동안 그림을 멀리하고 다시 찾게 된 건 집에 혼자 있데 되면서부터다. 넘치는 시간을 채울 길 없고, 손에 익지 않은 어른 흉내나 내는 살림이 막막했을 무렵. 다들 일상이란 걸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SNS에서는 좋고 예쁜 장면만 보이니 신뢰가 없고, 동네 친구라도 있으면 그 집에 놀러 가 구경도 하면서 사는 이야기 좀 나눌 텐데 그럴 일도 없었다. 자꾸만 내가 못하는 점, 하기 싫은 것들만 부각되는 일상이 부담스러워질 찰나, 그림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일기처럼 일상의 단상을 바라본다. 벽난로, 창문, 부엌, 침실 등 과거의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집은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나는 그곳에 당도해 신기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현재의 나를 되돌아본다. 이곳이 애틋해지고 소중히 다루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나면 지칠 대로 지친 일상이 천천히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 시작되는 기분, 이게 중요하다. 뭐라도 쓸고 정리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몸과 마음이 알아서 하루를 살아낸다.


 아무 일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드는 불안과 긴장이 연속되는 삶에서 한 장의 그림은 큰 위안을 준다. 부엌에서 초록 채소를 다듬는 뒷모습, 고요한 햇살 아래 앉아 구멍 난 천을 뜨개질하는 모습,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는 모습 등 끝없이 이어지는 외로운 집안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장면이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안정감이었다. 시간과 마음 모두 붕 떠있는 채 유령처럼 살고 있는 몇 주의 시간을 차분히 덮어버릴 수 있는 안정제가 필요했다. 집에 있는 게 좋으면서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 간극이 점점 심해질 무렵. 건조해 보이는 부엌에서 소박한 꽃을 화병에 꽂는 여성의 뒷모습이 그렇게 와 닿았다. 결국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누구 한 명 마주치지 않고 늘 혼자 하는 살림살이가 문득 두렵고 외로웠다. 그래서 같이 고민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퇴근하는 남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책과 영화, 그밖에 많은 것들이 있었음에도 그림책 하나만큼은 내가 언제든 쉽게 펼칠 수 있는 옆집 언니 같았고, 집이라는 공간을 답답해하던 찰나에 만난 집의 조언자였다. 그림 속 여인 뒤에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종알종알거리며 언니의 하루를 옆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고독을 지워주었다.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과묵한 그림 속 사람들. 서로를 응시하는 자리에서 많은 감각이 오간다. 코를 박고 그림 한 귀퉁이에서부터 천천히 풍경을 훑으며 네모난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핀다. 각자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내보이면 "삶이 외롭고 쓸쓸한 건 당연한 거야."라는 말을 듣는다. 마치 외로움과 고독은 삶의 필연이라는 듯이.


"당신도 서랍을 정리하는군요, 저도 해야 하는데 힘이 안 나네요.."



"오늘은 힘든 하루였나 봐요. 축 저진 어깨로 바느질하는 모습이 지쳐 보이시네요. 저는 괜히 자괴감에 빠진 하루였어요.."


 집안일의 소란스러움과 일상의 무게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또한 색과 색이 더해지고 그 위에 덧칠 되는게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느낀다. 타인의 색과 나의 색이 더해지고, 환경이나 관계의 여러 덧칠이 입혀지면 우리의 사는 모습은 수많은 색깔로 이뤄질 것이다. 결국 산다는 건 혼자였다가 여럿이었다가를 반복하는 일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 의미를 깨닫는 점에서 그림은 확실한 위로가 된다.


 마음이 차갑고 어두울수록 혼자서 조용히 응시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여럿이 왁자지껄하게 어울리는 것도 순간의 감정을 휘발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 모두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에서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혼자 있기 좋은 방]


일상의 파편들을 섬세하고 풍성하게 그려내면서도 감상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그림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결국 화가의 재능이 아니라 태도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의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이지만 삶의 단면을 오롯이 비추는 한 편의 드라마다.  




 나를 돌보는 일은 자연을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자꾸 인위적인 다른 사람의 생활방식과 편리함만 추구하느라 더욱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젠 타인의 인생을 부러워하는 대신 나만의 살림 태도를 유지하며 내 옆에 일어나는 일상을 잘 돌보기로 한다.


 물론 여전히 곧잘 외로움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깨가 서늘해질 정도로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친구들과 만나 헤어져 오는 길도 때론 허전하다. 그러나 그 길에 그림책이 있다면, 사람 사는 그곳의 풍경을 구경하며 오다 보면 내 일상을 잘 유지해볼 힘이 난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가 온다. 뜨거웠던 열기를 차분히 식히고 선선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 내 풍경은 또 바뀔 것이다. 그림 속 한 여인이 단풍나무 아래에서 편하게 책을 읽던 장면이 생각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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