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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Oct 21. 2020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더 잘 살아 보려고


 지금 막 인터넷 쇼핑으로 작은 엽서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넣고 오는 길이다. 브런치 앱을 켜서 바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쇼핑으로라도 엉덩이 예열을 해 놓아야 뭐라도 써지는 어쩔 수 없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오늘의 소비 욕구 목록은 부엌 한 켠 장식장에 꾸밀 엽서였다. 어둡고 고요한 먹색 바탕에 차분하게 놓인 커피잔과 빵이 그려진 그림. 마치 유럽 중세 시대의 식탁 한쪽을 떼어 온 것 같은 그 엽서가 끌린 이유는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싶어서다. 차분하고 고요한.


 요즘 분위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사전적 정의로 어떤 대상 또는 그 주변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

유의어로 공기와 냄새가 있다.


공기와 냄새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서는 문턱은 공기와 냄새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올해 유난히 긴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정확히 9월 1일 아침, 얼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고 출근하는 길가의 나무에선 건조한 풀 냄새가 났다. 너무 신기해서 다이어리에 적어 놓았는데 나만 느낀 건 아니었나 보다. 그날 만난 몇몇 사람, SNS에서도 그들이 느낀 가을 공기와 냄새가 흠뻑 묻어났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10월의 중턱에는 초겨울의 냄새가 공기를 누비고 있다. 집 안에서도 느껴지는 코 끝의 시림이 기모 이불을 끌어당기게 한다.


아, 그냥 가을이 되었고, 집 안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소비 욕구가 생기는걸 이렇게 장황하게 합리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예전엔 물건을 살 때 제일 처음 고려한 것이 '얼마인가'였다. 대개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2~3만 원대. 문제는 모든 항목을 이 비용을 기준으로 했다는 건데 그만큼 내 취향보단 얼마큼 싸게 대충 맘에 드는 걸 고를 수 있는지에 대한 검색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결혼 초에 산 옷걸이, 선반, 빨래 건조대, 전신 거울은 단순히 원목과 화이트의 색깔만 맞춘 모습으로 나중에 이사 가면 다시 사겠노라 벼르고 있는 물건들이다.



 물건이 주는 힘이 있다고 믿기 시작한 건 옷부터였던 것 같다. 톤 다운된 베이지나 크림색의 상의와 하의를 입고 다니면서 좀 더 성숙하고 분위기 있는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계절을 지내며 무광의 검은색이 세련미를 조금 플러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옷에서 가방으로, 귀걸이로 점점 소비의 즐거움을 확장해 나갔다.


 자연스럽게도(?)  신체에서 확장될 수 있는 영역은 주변 공간이 되었다. 그렇다. 이젠 분위기를 입힐 대상이 '집'이 된 것이다. 싼 물건들로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집은 확실이 깊이 있는 분위기가 없었다. 마냥 환하고 깨끗한 색감으로만 이루어진 거실과 부엌에 그늘진 구석과 사물의 깊이를 놓아주고 싶었다. 단순히 밝고 해맑은 사람보다는 약간은 어둡고 비밀을 보이는 사람이 훨씬 매력 있어 보이는 것처럼 집의 표정에 무게를 주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그릇장을 찾는데 몇 개월이 걸렸다. 제버릇 개 못준다고 취향과 가격의 조율 속에서 늘 돈이 앞섰다. 정말 이 가격으로 살 만큼의 가치가 있나? 별로 넣을 것도 없는데 50만 원을 준다고? 의도된 연출로 찍힌 사진만 보고 구입해도 될까?


 베이지 원목이 전체적인 컬러를 지배하고 있는 부엌에 당당히 들어설 그릇장은 한껏 어두워진 월넛 원목 그릇장이 당첨됐다. 말 못 할 속사정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짙은 브라운 색깔의 그릇장 속엔 잘 보지 않는 요리책, 큰 파스타 접시, 나무 쟁반, 장 볼 메모장, 매직 등등 잡동사니가 있지만 라탄 실로 촘촘히 가려져 있어 속이 보이지 않는 게 신의 한 수였다. 유리창 대신 선택한 실용성과 분위기를 다 갖춘 나의 감각이 생활의 민낯을 존중했다는 점을 스스로 뿌듯하게 여겼다.(쓰면서도 어이없네..)





그릇장이 놓인 벽에 좋아하는 그림을 붙이고 빈티지 촛대와 책을 쌓아두니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장소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은연히 위로도 되었다. 이곳을 꾸밀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물건을 찾고, 인연이 될 소품을 기다린 것도 덤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핫하다는 당근 마켓을 최근에 시작한 것도 무언가를 사고 싶어서였다. 거실에 놓일 커다란 액자가 바로 그 대상. 거실 베란다에서 밖을 보면 다른 아파트로 둘러 싸인 곳이 나의 집이다. 때론 묘하게 그 점이 안심되기도 하지만 하늘과 나무를 볼 수 없는 건 역시나 무척 아쉽다. 그래서 휑한 거실 한쪽 벽에 사진 액자로 창을 내기로 하고 맘에 드는 나무 그림을 찾아다녀 발견하고 말았다. 이틀에 한 번씩 거실 벽에 액자 사이즈를 쟀다가 말았다가 또 가격 앞에서 무수히 많은 방황을 했다. 30만 원이 넘는 액자를 벽에 걸겠다고? 하루에 집에 몇 시간이나 있는다고 그걸 사? 그것도 내 머리통 뒤에 걸릴 그림이라 잘 보지도 않을 텐데?


 도대체 나는 언제쯤이나 돼야 돈을 쓸 때 이렇게 많은 고민과 혼잣말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보탤 돈을 마련해 보자 해서 당근 마켓에 팔아볼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원래 벽에 걸려 있던 액자 두 개 5천 원, 두 번 맸던 루이까또즈 가방을 십이만 원에 내놓고 초조하게 연락이 오길 기다린 지 이틀 만에 가방이 십만 원에 팔렸다. 이만 원은 보증서가 없으니 쿨하게 깎아주기로 하고 비가 부슬부슬 오던 퇴근 후 저녁, 현금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그 주 토요일 큰 사이즈의 액자를 주문했다.


 엄마도 갸우뚱, 어머님도?? 표정을 지으시며 "이쁘네"라고 말하셨던 나무 사진의 액자는 내게 심심치 않은 위안을 안겨 준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고요한 분위기에 잘 어울리고, 밝으면 밝은 대로 생기가 있다. 화장실을 오가다 흘끔 보고 아일랜드 끄트머리에 앉아 글을 쓸 때도 물끄러미 액자의 측면을 응시한다. 크고 깊은 그늘을 가진 초록 나무가 주는 힘을 집 안에서 얻는다. 무슨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힘들고 외로운 날이면 기꺼이 액자를 바라보며 마음을 정리한다. 조용히 다짐 같은걸 하기도 하고, 뭔가에 대해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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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풍경마다 고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가장 먼저 조절하고 움직이는 것도 바로 그 분위기죠.

( THE T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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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화장을 할 때 졸린 눈을 겨우 옆으로 살짝 돌려 속으로 작게 기도를 한다.


'오늘도 무사하기를'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건 내가 만들어 낸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 빈티지 샵에서 즉흥적으로 인연이 된 나무로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상과 그 주변 공기를 에워싸고 있는 초와 엽서들. 이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안방 한 켠에 작은 기도 장소가 되더니 출근하기 싫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밖으로 나가도록 스스로 힘을 내는 곳이 되었다.


 꾸준히 집에 분위기를 입히는 이유는 결국 나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선연한 장면으로 남기고 싶어 꾸준히 내 정서에 맞는 물건을 사고 곁에 두었더니 모르는 새에 나를 가장 편하게 혹은 좋은 영감을 얻는 풍경으로 그려진 것뿐이다.


 차분함과 고요함. 나의 바람과 소망이 투영된 모든 것들이 기꺼이 나를 일으키는 소중한 의미가 되었으니 이런 분위기를 사랑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다.


 오후 2시에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 사이로 사물들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그림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나를 차분하게 만드는 효과도 알게 되었다. 밖에서 일하고 떠들어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온 날엔 남편과 각각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조용한 시간을 갖는 이 시간이 꽤 소중하다. 천연 밀랍초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며 쌀쌀해진 집안 공기에 따뜻함을 불어넣는 자기 예배의 시간. 불멍 대신 촛멍으로 무의식의 세계로 가보기도 하며 부산스러웠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고 일상을 마무리를 하는 작은 의식을 꾸준히 치르고 있다.


 결국 공간이 지향할 대상은 사람인 듯도 하다. 잘 만들어 놓은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읽고,  쓰고, 생각하는지로 분위기를 완성시키는 것.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밥을 해 먹었고, 분리수거를 하고, 글을 썼다.

그리고 매일 더 나아져 보려고 분위기에 기대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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