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외로움이 몸 전체를 압도한 듯한 날들이.
처음 '외롭다'라고 느낀 건 혼자 주차 도장을 찍는 알바 중일 때였다. 가을 즈음이었고, 낯선 사람들이 오가던 그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문득 너무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입 밖으로 ‘이게 외로움인가’를 중얼거렸던 것도 같은데 눈물이 목까지 왈칵 차오르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스물두 살. 우울하고 불행한 건 알았어도 외로운 건 뭔지 몰랐던 내가 그날 갑자기 이 단어를 몸으로 알아버렸다.
그렇게 찾아온 외로움은 종종 살에 닿은 듯 선명하게 남겨졌다. 남자 친구와 서울대공원에 놀러 간다는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씁쓸한 시간에서, 한 커플이 다정히 손잡고 마스크팩을 고르는 모습을 부럽게 보고 있던 성탄절 알바생인 나에게서.
다들 소란하고 따뜻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이곳에 나만 혼자 남겨진 기분이, 기분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로인 것만 같아 뼛속까지 외롭고 쓸쓸했던 날들이었다.
그때는 무척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다정하고 따뜻한 눈이 나를 바라봐주길 원했고, 살과 살이 닿는 스킨십에 설레고 싶었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매일 만나는 무언의 약속이 생기길 바랬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고, 학교 후 집, 아르바이트를 끝나도 바로 집에 돌아와 드라마만 보는 나는, 혼자였다.
어느 날은 나만 볼 화장을 하고 지하철을 타서 이수역에 있는 국립박물관을 갔다. 혹여 거기에 갔다가 운명적인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싶어 돌아다녀봤지만 결국 나는 혼자 집에 돌아와 엄마와 저녁을 먹었다. 이왕 나갔는데 저녁 함께 먹을 친구 하나 없다니. 스스로를 참 한심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이 고프면 그랬을까. 그러나 누굴 만나고 싶으면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혼자 강한 척만 해대는 이상하게 답답한 나였다.
외로울수록 아닌 척 웃어넘기는 게 내 자존심이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친구들에게 외롭다 솔직하지 못했고 사랑에 무심한 척, 남자에 관심 없는 척, 나만의 세계가 즐거운 척하느라 외로움은 철저히 숨겨졌다. 태연함을 가장한 채 사랑받고 있는 연기를 했다.
첫 이별이 무서웠던 이유도 다시 외로워질까 봐 겁이 나서였다. 친구들은 그깟 놈 헤어지길 잘했다 했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매일 아침 그에게서 받던 문자와 퇴근 후의 약속이 사라지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외톨이의 내가 너무 안쓰럽고 슬펐다. 다들 이 세상 주인공처럼 연애를 하는데 아무도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 이별 후 이 세계가 몹시도 두려웠던 거다.
이런 감정을 알기 때문인지 언제부터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 눈에 보였고 저절로 이해도 됐다. 연인의 문자 하나에 울고 웃는 친구를 보면서, 다른 친구는 쟤는 자존감이 없어 저런다 타박해도 나는 진심으로 이해됐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어도 그건 별개고 사랑은 또 다른 거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혼자라는 감정을 증폭시키고, 곧 그게 외로움이 되고 점차 혼자라는 사실이 무서워지는 걸 아니까.
친한 친구가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좋은 가정을 꾸리는 걸 보게 되면 결혼병이라는 게 생기는데 얼른 남자 하나 만나 빨리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초조한 마음을 뜻한다. 옆에 연인이 있다면 결혼을 푸시하게 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누구든지 만나고 싶은 조급함이 생기는 이상한 시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건데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냐고,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외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사랑받고 싶다 말할 수가 없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본능이지 않나요.
왜 우리는 외롭다고 솔직하면 안 되는 걸까?
자존감이 없어 보여서?
혼자서 잘 놀고 잘 먹어야지만 쿨해 보이니까?
그게 진정한 어른이라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쓰인 수많은 노래와 시와 문학은 다 사랑에 약해빠진 사람들에나 어울리는 것들일까?
요즘 즐겨 보는 블로거가 있다. 정황상 나이는 40대 초반이신 것 같고 본인의 입으로 모태솔로라고 하시니 그건 넘어가고, 중요한 건 사랑받고 싶다는 솔직함이 온 글에 묻어난다는 거다. 그게 얼마나 솔직하냐면 가령 짝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수시로 부르면서 그분과 책도 보고, 마트도 가고 아이도 셋 정도 낳아 안락한 집에서 누워있고 싶다는 자세한 소망을 적어 놓는 글이 꽤 많다는 건데 제발 이 외로움 좀 누가 가져가라고 외치는 글이 블로그의 주제인 듯하다. 사랑받고 싶다는 외로운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용기가 처음에는 이상해 보였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그분과 잘 되기를 응원하게 되었다.
이토록 자신의 외로움에 솔직한 사람이 몇몇이나 될까. 나만 해도 괜찮은 척하느라 20대를 찌질하게 보냈고 최근까지도 자기의 외로움을 온몸으로 티 내는 사람을 현실에서 본 적이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이상하게 봤을 거다. 이게 다 외로워 보이면 괜히 없어 보이는 사람처럼 프레임을 씌운 이상한 시선 탓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 영화는 친구 부부의 오붓한 사이를 질투하고 욕심내는 메리의 이유를 외롭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바라보게 한다. 메리가 사랑했던 남자는 모두 떠나고 본인조차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해서 자꾸만 탐낼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며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조급함과 불안함에서 오는 감정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고 그저 외로워서 저런다는 한 가지 논리로만 판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볼 필요가 있다. 주는 사랑 말고 받는 사랑 좀 해보고 싶다고.
남자 아니면 네 인생은 없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다 말하고 싶다.
그게 뭐 어때서. 때로는 그로부터 받는 사랑만이 내 삶을 구원하기도 하는 거니까.
결혼을 한 지금까지도 외로움은 나의 취약점이다. 가끔 꿈에서 사람들이 끼리끼리 뭉쳐 나를 따돌리면 그 꿈속에서마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외로워 깬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것이 진짜인양 슬퍼한다. 분명 내 옆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외로움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이렇게 불쑥불쑥 다가와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행복은 모든 걸 떠벌리고 티 내는 반면, 외로움은 모든 걸 감춘다. 함께 웃고 있어도 사람의 속마음은 모르겠고, 모든 게 좋아 보여도 뭐가 힘들고 어려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괜찮다니까 괜찮은가 보다 싶지만 적어도 겉으로 티 나게 외롭다고 신호를 보낸다면 좀 나을 것 같다. 아니, 잘 모르겠다. 나도 아직 이 외로움을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타인의 외로움을 어떻게 해 볼 도리라니. 자신이 없다. 그저 내가 해보는 거라곤 좋다고 여기는 책을 읽거나, 그 문장을 필사하는 밤을 갖는 것뿐이다. 이것도 안 되는 밤이면 슬플 것 같은 영화를 찾아보는데 결국은 외로움을 떨치지 못하고 마음과 몸 한편에 또 남기는 밤이다.
다들 저마다의 몫인 외로움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사랑만이 외로움을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라고 느낀 순간 누군가 한 명쯤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인만 보내 준다면 그 주파수가 얼마나 약한지는 상관없이 버텨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정희는 외롭고 고독한 길 끝에 서 있는 여자다. 아마도 평생 사랑할 남자는 절대 뒤돌아 보지 못할 강을 건넜고, 그 강을 떠나지 못해 괴로운 정희. 술과 안주로 친구들을 위로하던 정희는 정작 그녀는 누구로부터 위안을 얻지 못하고 퇴근길 가게 문을 닫고 나와 괜한 동네를 한 바퀴 휘돌아 다시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지친 몸을 뉘이는 사람이다.(이 드라마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슬퍼하는 장면이다.) 나라도 따뜻하게 그녀를 안아주고 싶지만 정작 정희는 조금은 성숙한 방법으로 외로움을 다룰 줄 아는 멋진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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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 넘어져 코피가 나는 상황)
괜찮습니다. 씻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제정신인 겁니다. 어디서 피가 흘렀을까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빨래를 하면 그렇게 취한 건 아닌 겁니다. 그날 입은 걸 빨면 난 아직 괜찮은 겁니다.
괜찮은 겁니다. 제정신인 겁니다. 씻었고, 속옷도 빨았습니다. 나는 오늘 일과를 다했습니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시체처럼 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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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렇게 외로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쓴 이유는 딸을 혼자 보낼 수 없어 함께 간다는 어머니의 메모에서 비롯되었다. 결코 보내고 싶지 않은 그 길에 혼자 걸을 딸이 외로울까 기꺼이 손을 잡은 모녀의 기사를 한참 바라보면서 그냥 그 두 분이 더 이상 외롭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