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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Dec 10. 2020

일하는 마음들

ing의 마음



다다음주면 이 회사에서 일한 지 꽉 찬 3년이 된다. 시간이 정말 빨리 흘렀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사무실에 있는 9시간은 이렇게 지루한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12월이 되었고 이직률 높다는 세 살 직장인이 되었다.  


세 곳의 회사를 다니며 만난 사람도 많았지만 싫은 사람은 더 다양했다. 때때론 일 자체가 곤욕스러워 화장실에 숨어 있기도 했고 결국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만둔 회사도 있었다.


손가락을 세어 보니 공백기를 제외하고 오롯이 회사에 몸 담았던 시간이 8년이 된다. 아직 10년도 채우지 못했다니.. 쪼무래기구만 싶지만서도 나름 선방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점점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유연해지고 상황이 아닌 나를 믿는 순간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유독 이번 회사에서 동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첫 회사에서 첫정을 줘버린 선배가 훌쩍 떠난 뒤론 함께 일하는 동료를 믿지 않았다. 의지하고 잘 따랐던 선배가 미안하다며 훅 떠났을 때 남은 그 서늘한 사무실 공기는 차라리 낭만적이었고 뒤치다꺼리를 홀로 수습해야 하는 게 찐 조직생활이었다.


동료는 그저 한 공간에서 일하며  잠깐 공적인 이야기나 나누는, 고만고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상사 뒷담화를 하며 마음 맞는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사적인 감정이 절대 끼어들지 않도록 마음 단속을 수시로 했던 것 같다. 언제 떠나도 쿨하게. 아무렇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로.



3년의 공백기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달라져서였을까.


지금은 수시로 마음을 단속하지도, 꽤 친하게 지내지도 않지만 어쩐지 은근한 동료애가 생겨 버렸다. 3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지지고 볶으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원치 않아도 사람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는데, 가령 팀장은 어떻게 보고하는 걸 좋아하고 어떤 말버릇을 싫어하는지. A 동료는 기본 성향이 물 같은지, 불같은지. B 동료의 일하는 습관은 어떠한 지 등이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각자 책상에 얼굴만 파묻다 퇴근할 때도 많지만 3년 여의 시간은 성의껏 쌓여 그동안 주고받았던 대화와 몸짓과 눈치로 얻어 챙긴 감각이 꽤 두껍다.


팀장은 일만 잘하면 OK인 사람. 리액션이 풍부해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줘야 하지만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을 필요가 있다. 과정보단 결과가 좋아야 하고 혼내고 난 뒤 뒤끝은 없으니 나 혼자 감정 상하다 스르르 풀리면 괜찮은 정도인걸 차근차근 알아왔다.


A 동료는 굉장히 차분한 사람으로 팀장과 비교하자면 둘은 정 반대의 텐션을 가지고 있어서 한 가지를 물었을 때 30초의 침묵쯤은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라 골똘히 생각하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중인 그녀이기 때문에 재촉하지 않고 나도 차분히 기다리면 된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B동료는 아직 캐릭터 파악 중..



이런 성격을 알아두면 뭐가 좋냐고?

별로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일하다 보니 몸으로 느끼는 바가 크다. 일하는 데 있어 적절한 때에 언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타이밍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그들의 일하는 방법이 내게 반면교사가 되어 나의 장점과 단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내가 곤란한 일에 처했을 때나 혹은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동료들에게 언제 부탁을 하면 되는지, 또 어떻게 접근해서 필요한 업무를 처리할지 결정하는데 꽤 유용하다. 이렇게 글로 쓰니 너무 정 없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각자 맡은 업무를 충실하게 해낸다는 건 서로를 이용하고 또 협조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며 함께 일하는 중이다. 그래서 나 또한 그들에게서 이용당하고 있음을 전혀 섭섭해하지 않는다. 기꺼이 도와주고 싶고,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고 피드백도 얻는다.


다 큰 성인들이 하는 일에 거창한 게 없다. 상대가 놓친 것이 있다면 조용히 일러주고,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슬그머니 덮어 주기도 하면서 모두가 와장창 혼나고 되는 일 없을 땐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며 같이 견디는 사소한 일들이다. 그런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우리가 굴리는 모난 바퀴는 점점 둥글어지고 있다고 믿으며, 일에 필요한 본능과 감각을 세밀하게 다듬어 간다.


일하는 마음엔 동료애도 있지만 언제든 조직을 떠나 혼자 일하게 될 날을 대비해 배우는 마음도 있다.

연차가 쌓여 좋은 점은 내가 하고 싶은 기획이나 행사를 조금씩 진행해 볼 수 있다는 건데, 그 과정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은 도닦는 수행 개념의 마음뿐 아니라 내가 얼마큼 해내고 싶고, 할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곳도 된다.


나는 병원 행정부서원으로서 여러 일을 담당하지만 그중 하나는 병원에 있는 홍보 게시판을 만드는 일도 있다. 작게는 진료 시간 안내부터 크게는 새로운 진료과목의 홍보나 병원 행사 등을 알리는 일까지,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서 보여줄 것인지 구성한다. 디자인과 카피를 팀장님에게 컨펌받고 병원에 있는 디지털 사이니지에 송출하여 곳곳에 보이도록 하는 기본적인 일이지만 글로는 쉬워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별별일이 다 일어난다.


일단 기기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럼 일단 달려가 TV 모니터를 껐다, 켜보면서 전원을 확인하고 시간 예약 앱이 잘 설치되었는지 보고, 전선이나 랜선의 문제는 아닌지 확인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적용시켜보며 결국 하나의 일을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팀장의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기기 설비 업체에 전화해 다른 해결 정보를 얻거나 아니면 접점이 전혀 없는 다른 부서원이 지나가는 말로 던진 힌트를 주워 응용해 보기도 한다. 정해진 답을 맞히는 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을 해보려는 자세와 행동이 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

대학원의 교육 목표는 대학의 교육목표와 다르다. 아무도 떠먹여 주지 않는다. 정답이 주어진 문제만 풀어온 사람은 이 단계에서 좌절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 연구 질문을 던지고, 리서치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책,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직장인의 업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떤 업무를 해내는 데 정답은 없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컨택할 수 있는 사람, 알고 있는 업무 지식 등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이용해 사람들과 조율하고 맞춰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모든 일의 기본이고 시작이다.


그래서 스스로 프로젝트 주제를 정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모으고 어떤 방법으로 일할 것인지 목차를 만드는 경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중에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더라도 이런 과정을 알면 첫 단추를 끼우기가 수월하니까. 무슨 일이든 정리가 안 돼서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순서만 잘 만들어 놓으면 일은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으므로 회사에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을수록 좋다. 공유, 협업, 커뮤니케이션을 연습하는데 회사만 한 곳이 없고 플랜 A뿐 아니라 B, C, D까지 만들 수 있는 여력은 조직에 몸 담을 때야 가능하단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모두들 일하는 마음은 비슷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파는 책이 많은 사람이 읽어 줬으면 좋겠는 마음. 내가 그린 그림이 타인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면 하는 마음.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


모쪼록 다 잘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모여 우리는 함께 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습득해 가고 질서, 관계, 감정, 이성, 효율성 같은 다양한 것들을 챙긴다.


'일'이란 건 참 오묘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말 가기 싫은데 책상에 앉아 시작하면 또 어느새 잘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이왕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또 어느 날은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에잇 때려치워하는 나를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애써 다독인다.

이런 날들을 엎치락뒤치락 보내며 일에 대한 내 마음 씀씀이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나는 요즘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내게서 일이란 무엇인가'에서 '내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로.


처음에는 일의 의미와 존재가 대단한 줄 알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을 통해 자아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욕심이 컸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공허하다는 걸 안다. 단지 내가 받는 월급을 정당한 몫으로 클리어하게 받고 싶은 마음, 그러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훨씬 일하기가 편하다.


결국 회사의 일은 '그 사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한 '나의 노동 값'이니까.


-

액션을 보여주는 게 일꾼의 예의예요.

(책, 일꾼의 말)


'보여 주는 것'과 '보이는 것'을 신뢰함으로써 조직을 명쾌하고 건전하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프로는 많은 경우, 진심을 숨긴 채 태도를 결정한다. 이성적으로.

(책, 진심은 보이지 않아도 태도는 보인다)



자꾸만 상황에 떠밀려 일하는 게 무섭고 나태해질 때 저 두 책을 만났다. 일에 대한 여러 생각과 조언이 있었지만 하나의 주제로 내 가슴에 들어온 건 어쨌든 조직의 일을 해내려면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행사가 잘 진행되려나?

박 팀장님이 결재해 줄까?

업체는 또 어떻게 선정하지?


큰 일을 시작할 때 머리에 온갖 걱정과 불안만 가득하기가 부지기수다.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해버린 기분이 들고 자꾸만 미루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럴 때 극약처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을 하고 있는 것. ing.


머리로 생각만 하지 말고 손과 발을 움직이라는 의미다.


일단 행사를 왜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누가 주최자이고 내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정하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로는 필요한 업체를 인터넷으로 찾아 견적을 2~3개 받고(하나는 버리는 카드), 나름의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들어 기획서를 보고하고, 세 번째는 각 팀원들에게 본인의 업무에 맞는 역할을 분배하여 각자 클리어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세 번째 팀원에 속하므로 행사 일시와 주제 카피를 정해 게시판에 공고하고 필요하다면 SNS 채널에 맞는 콘텐츠를 더 만들거나 행사날 사진 촬영을 도맡기도 한다. 이때 촬영이 익숙지 않아 불안하다면 카메라 감도와 속도, 밝기를 조절하는 포스팅을 찾아보거나 매뉴얼을 읽으며 미리 여러 곳을 찍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계속하고 있으면 이 자체만으로 불안이 서서히 줄어들고 내가 해야 할 리스트가 단순해지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려 볼 수 있게 된다.


일이란 막상 해보면 쉽게 풀리기도 한다. 지레 겁먹고 하기 싫다는 마음이 지배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일단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걱정이 아닌 To do list를 작성하면 뭐가 중요한지 보인다. 그것들을 차근차근 해내다 보면 문제가 풀리기 마련이다. 나도 이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시행착오 중이지만 또 연차가 늘면 지금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대체로 회사의 일이라는 건 저절로 되는 게 전혀 없다. 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다가설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이미 생겨버린 문제를 얼마나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다.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서 나의 할 일을 찾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 방법을 고심하는 것에서부터 나의 일하는 마음은 시작한다.


사실 내게 회사는 월급 그 이상과 그 이하의 의미도 없지만 어쨌든 일하는 자체를 존중하는 과정에서 나란 인간을 인격적으로 좀 더 성숙시키고 일하는 어른으로서의 톤 앤 매너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곳이라 여긴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하는 장면은 12시 59분까지 함께 커피 마시며 떠들다가도 1시만 되면 제자리로 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각자 에 몰두하는 동료들과 나의 모습이다. 함께인듯 따로.

일하고 있는 나를 믿고, 옆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료를 믿으며 오늘도 일하는 마음을 채우러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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