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거실에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어도 저번 주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을 보내며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난 12월의 내 행적에 대해 고백해 본다.
언제부턴가 12월이 되면 아무도 몰래 나 혼자 다짐 같은 걸 하곤 했다.
절제의 12월을 보내 보자라고.
그동안 펑펑 쓴 소비를 줄이고 오지라퍼답게 참견했던 감정과 말을 아껴보자는 나만의 의식 같은 거였다.
한 해의 첫 달에 시작해 봐도 좋았겠지만 나는 반성의 의미로 마지막 달에 시작했고 은근슬쩍 1월로도 이어지기길 바랐다. 또한 2020년 동안 감사를 많이 누렸으니 마지막일 때라도 은연중에 생긴 욕망과 여러 불순물들을 내려놓는 연습의 의미로 말이다.
그래서 시작한 게 일단 용돈을 쓰지 말자였다. 생필품, 회사에서 마실 수혈과 같은 커피, 아침 식사 대신 뱃속에 넣는 핫바 같은 걸 제외하고 옷, 액세서리, 책, 화장품 등 일절 내 사심이 들어 있는 소비를 제한했다. 처음 5일은 정말 12월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에 큰 충격과 답답함을 느꼈지만 하루하루 디데이를 기다리듯 절제하는 마음으로 지켜 나가니 이 또한 할만했다.
유일하게 사심을 채운 소비가 하나 있었다면 영화 '봉쇄수도원'을 결제하고 본 것뿐이다. 그 외에는 사고 싶었던 골드링, 액자(아직도 사진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음), 연말 세일하고 있는 원피스를 모두 패스했다. 쇼핑 결제는 거의 인스타그램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만 잘 컨트롤하면 의외로 어렵지 않은 소비 절제의 달을 보낼 수 있었는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건 물건도 마찬가지란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혹할라치면 얼른 손가락으로 피드를 내렸다.
쇼핑을 안 하니 자연스레 넷플렉스를 시청하거나 퇴근 후 책을 읽는 시간이 늘었다. 물론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오거나, 전자 도서관에서 대출한 것, 저번 달에 미리 구입해 놓은 소설을 주로 돌려 가며 읽었고,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시간에는 아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넷플렉스에 있는 많은 시리즈들을 섭렵했다. 요즘 빠진 콘텐츠는 중국 드라마 '겨우 서른'.(2040 여성분들은 꼭 보세요. 재밌어요.)
이 조용한 시작 프로젝트를 하게 된 영감 중 하나는 영화 '봉쇄수도원'이 있었다. 영화 프로그램에서 잠깐 봤을 뿐인데 멈칫하게 된 순간이 이것의 시작이었다.
아시아 유일 경북 상주에 있는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에는 일평생 봉쇄 구역을 떠나지 않는 11명의 수도사들이 있다. 이들의 삶은 오직 침묵과 고독,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스스로 선택한 삶으로 기도방과 작업실, 텃밭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독방에서 온종일 기도와 묵상에 전념한다. 가족들은 1년에 두 번 찾아와 볼 수 있지만 식사는 함께 하지 못하며, 가족이 죽어도 수도원을 떠나지 않는다. 보는 내내 극한의 절제가 내 생각을 옥죄었지만 이상하게도 수도사들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럼에도 신은 인간이 겪는 완벽한 절제는 힘든 걸 알고 계셨는지 매주 한 번 이뤄지는 산책을 허락하셨는데 여기서 정신적 고통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해소시킨다는 점이 굉장히 신선했다.
엄격한 규칙과 영적인 일들에 전념함으로 인해 지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다소 예민한 본성들은 숲과 교외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통해 활력을 얻고 새롭게 된다. (카르투시오 헌장 22-10)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크게 느낀 위대한 소박함은 손으로 그린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의 장면과 발뒤축이 다 없어진 양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신고 계신 수도사들의 모습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것들을 비워내는 삶이 너무도 신선하게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영화 개봉 후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양말 선물을 많이 보냈다는데 그것마저도 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렴풋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많은 형식과 눈에 보이는 것들만 좇고 살진 않았는지, 그동안 무얼 위해 그렇게 돈을 벌고 쓰고, 또 쓰면서 행복해했는지 제대로 돌아보게 됐달까. 물론 그런 큰 깨달음을 한 번에 얻을 순 없었지만 이런 소박한 나만의 프로젝트만이라도 해볼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영화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에서 더 엄격하게 가난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의 풍요로움을 나누기 원한다면 그분의 가난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카르투시오 헌장 3-3)
두 번째 시작된 조용한 나의 프로젝트는 십 년 다이어리 쓰기다. <물건이 건네는 위로> 책에서 보고 처음 이런 다이어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한번 써볼까? 하는 다소 귀엽고 싱거운 마음으로 덜컥 구입했다. 물론 11월에 ^^
가벼운 마음으로 샀지만 망설였던 건 역시 매일, 그리고 꾸준하게 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다. 1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를 적어 보겠다고? 정말?
무엇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일이 없는 나였기에 뭔가를 이뤄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제 서른여섯인데 아직도 스스로를 애처럼 느끼는 구석이 있어 어른 구실을 할 만한 것이 필요했고 내가 동경하는 ‘꾸준하게 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10년 동안 다녀볼 생각은 엄두도 못 내겠고 자기 전 3분 스트레칭도 매일 빼먹기 일쑤였으니, 이건 좀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이어야 했다.
쓰면서도 과연 현실적 일지 싶지만 어쨌든 2021년은 시작되었고 현재 1월 5일, 1일~4일 칸에 뭔가가 적혀 있다는 게 중요하다. 겨우 작심삼일을 넘기고 미리 떠벌린 것 같아 쑥스럽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일단 해보는 수밖에.
원래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주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해보는 걸 좋아한다. 왜? 혹시라도 실패할까 봐서이고, 말만 해놓고 이미 다 이룬 것처럼 느껴 금방 싫증을 내기 때문인데 운전면허도 그렇게 따고 자격증 시험도 그렇게 보고 취업도 가족들 모르게 조용히 면접을 보고 '나 다음 주부터 출근해'라고 통보했다.
이 과정에서 너무 입이 근질거리면 싸이월드 일기장에 나만의 암호를 적었고 블로그 비공개에다가도 글로 풀었다. 마치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던 사람처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조용히 뭔가를 시작하는 걸 좋아한다.
의뭉스럽고 은근하게.
성공하면 그로서 기쁘고, 실패하면 혼자 속상해하면서 반성하다 끝이 난다. 결과야 어찌 됐건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주변 사람들에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니 그로서도 충분하다.
이번 12월의 프로젝트도 남편도 모르게 나만 아는 실천이었음은 물론이다. 내 이름의 택배가 줄고 한 달 치 용돈 잔고는 그대로인 ‘나 혼자 뿌듯한’ 프로젝트. 물론 이 시기에도 말이 너무 하고 싶어 남편에게 '나 혼자만 하고 있는 뭔가가 있어'라고 슬쩍 흘렸는데 남편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었다지.
어쨌든 이 프로젝트를 마침으로서 2020년을 잘 마무리한 기분이다. 소비욕을 많이 비워내진 못했어도 견물생심, 애초에 눈에 담지 않으면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걸 배웠고, 어느 정도 나를 통제할 수 있단 자신감도 얻었다.
아마도 자제력. 절제력.
이것들에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 너무 본능만 추구하며 살진 않았는지 검열이 필요했고 크고 작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을 잘 살펴보고 싶었다. 특히 코로나 19로 외출도 못해 집과 회사만 반복하던 내가 자꾸만 뭘 사는 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더했기 때문에 이 조용한 시작이 꼭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의 중심을 다시 맞추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때였다.
몰래 시작한 12월의 조용한 시작은 막을 내렸다.
안 쓰고 버텼던 소비 절제력은 1월 1일이 되자마자 쇼핑 두 건으로 봉인 해제됐고, 다이어리도 눈에 띄는 곳에 잘 두어 시간에 관계없이 보이는 족족 써두자는 긴 전략을 짰다. 어느 날은 감사함에 대하여, 또 어느 날은 미안함에 대해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계획이나 일정보다는 내 감정에 관해 쓰고 싶다는 다짐을 하면서.
좀 더 바람이 있다면 1월에도 은근슬쩍 시작을 해보는 거다. 새해 목표는 매년 우려먹는 사골 국물 같은 거니까 의식하지 않고 원래 그래 왔던 것처럼 이어가면 1월의 거창함 말고 헐렁한 마음으로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조용한 시작은 아직도 ING 중이라는 걸 대나무 숲에 외치듯 브런치에 끄적여 보았다.
물론 나는 의뭉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에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시작을 남겨 두었음을 슬쩍 말해 둔다.
사진 출처
오늘낡음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