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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an 19. 2021

필사의 방, 스타벅스



좋은 습관으로 만들고 싶었던 필사였지만 역시 뭐든 '좋은'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단어와 문장, 글의 구조까지 공부할 수 있는 필사의 장점을 익히 들어왔기에 일단 시작해 봐도 역시나 공책을 펴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렸고 매일 필사로 이어지는 밤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주로 넷플렉스에 마음을 뺏기는 밤이 계속될 뿐.



 그런 내가 필사를 참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이별 후였다. 안양시청 앞에 있는 스타벅스는 한 때 나의 아지트였다. 집에 있기 외롭고 쓸쓸하다 싶으면 책 한 권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 사람 구경도 하고 책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곳이었고, 결혼을 앞두고서는 여러 계획을 세우기 위해 강남역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예산을 짰다. 결혼 후 재택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스타벅스로 달려가 일을 했을 만큼 일이든, 공부든, 외로움이든 스타벅스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나의 부족한 정서를 품어준 공간이 됐다.



 결혼 전, 다른 이와 데이트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서-


 안양시청 앞 스타벅스 옆에 엔제리너스가 생겼더랬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데이트할 적엔 스타벅스보다 그곳을 더 자주 갔던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한 건 그를 잊지 못해 찌질하게 울며 미련의 문자를 보낼 때와 답장을 기다릴 때도 그 엔제리너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건데 그만큼 함께 했던 공간이라도 붙잡고 싶어서였을까? 같이 모은 커피 쿠폰도 매몰차게 버리지 못할 그런 때였다.



 당시엔 슬프고 복잡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나랑 비슷한 시기에 이별한 친구와 연극도 보러 다니고 일상을 꽉 채워 바쁘게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별이란 건 혼자 정리해야 하는 걸 깨달았고, 그렇기에 나의 공간이 절실했다. 집은 엄마와 아빠가 있어서 맘껏 힘들어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일상적인 분위기가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웃을 수 없어 근처 공원에 나가 몇 바퀴씩 걷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곤 드디어 헤어짐을 인정하고(차였음을), 그를 기대하는 마음을 다잡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스타벅스로 향했다.



 연애하느라 잊었던 나의 공간. 어두운 조명이 테이블을 비추고 초록과 브라운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커피 내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흐트러진 나의 스타벅스는 그대로였다. 다만 내가 한눈팔고 있는 사이 시청이 보이는 창가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서 다시 내게 주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모처럼 발을 붙인 스타벅스에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다. 주말마다 한국사 공부를 하며 헛헛한 마음을 채웠고 시각장애인의 책을 위한 워드 필사를 시작했다. 이것도 봉사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외로운 마음이 좀 가실까 하여 알아본 건데 책을 필사하는 봉사활동이라니. 때마침 내게 주어진 운명 같은 일이었다.



 어떤 책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권씩 차곡차곡 글을 옮기기 시작했다. 온 신경과 마음을 책과 타이핑에 집중할수록 불안했던 마음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누그러졌다. 둘에서 혼자가 된. 외로운 낮을 붙잡아 일으켜줄 공간이 생기면서 필사하는 방은 그렇게 시작됐다.



 톡톡톡 톡-

 이번 필사는 그동안 해왔던 문장 베끼기와는 전혀 다른 결의 행위였다. 손 끝으로 낯선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잘 되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따옴표, 마침표, 쉼표도 빠지지 않았는지 다시 보는 작업 개념의 필사 방식이었다.


 처음엔 책을 필사하고 있으면서도 온갖 잡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더니 몇십 장의 페이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서서히 책 내용의 리듬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점점 ‘쓰는 행위’로 몰입도가 바뀌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행위, 설령 남이 쓴 문장을 빈 화면에 가득 채우는 일일지라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기운이 났다.



 꽤 긴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고 시작한 이 작은 움직임은 몸과 마음을 다시 재정비할 기회로 이어졌다. 특별할 일 없는 평일을 꾸역꾸역 보내고 나면 토요일 점심 스타벅스로 가 아이스 라테 한 잔과 샌드위치를 시키고 좋아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다. 마음 달래줄 책도 읽고 스케줄도 좀 정리하면 바로 노트북을 켜서 필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작업이 더뎠던 이유는 워드 필사도 다 형식이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제목, 소제목, 문단을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내가 편하게 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점이 한껏 늘어져 있는 내 정신과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매주 필사를 하니 나의 이야기도 털어놓을 용기가 생겼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감정과 내가 겪었던 불안, 그로 인해 받은 상처와 나의 부족한 면을 글로 썼더니 이상하게 그동안의 시간이 별 일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리고 심지어 홀가분해지기까지 했다. 마음으로만 품고 있던 감정이 기분을 벗고 종이 위 활자로 옮겨져서였을까. 내가 만든 상황이라기보다 그냥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었다고 생각되어 그제야 담담하게 이별 후 모든 것들을 보낼 수 있었다.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책-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혼자의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이별 후의 주말. 스타벅스와 필사 덕분에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다시 혼자가 되는 일에도 당연해질 수 있었다. 두렵고 막막한 환경에 놓였을 때 언제든 가서 익숙한 메뉴를 고르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직도 나는 모르는 동네에 가서 목적 없이 카페를 찾을 때면 스타벅스로 간다. 면접 후 떨어진 느낌이 들었을 때도. 남편과 싸워 기분이 안 좋을 때도. 한껏 욕을 먹고 우울하게 퇴근할 때도 가끔은 스타벅스에 들러 차 한 잔 시켜 놓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감정을 쏟아 내고 온다. 친구와 만나는 사람들,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 커피 한 입에 창밖을 보는 다양한 사람들 곁에서 멍하니 있다가 스스로 감정을 잘 추스르는 거다. 아마도 카페 특유의 분위기와 커피 원두 향, 시끄럽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백색소음들 덕분에 마음이 좀 더 너그러워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온전히 혼자 있고 싶다가도 주변에 낯선 사람들이 있으면  기분이 증폭되어  철저히 외롭게 느껴지는  같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럴 바엔 집에 틀어 박혀 있는   낫지 않냐고도 는데 나의 경우는 혼자 있고 싶은 감정이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서 낯선 이들 사이에 있기 위해 나가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한 타인일지라도 어쨌든 사람들 사이에 속하고 있다는 안정감이 위로가  때도 있으니까.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해 카페를 찾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이유로 카페를 찾는 나 같은 사람도 어딘가에 있지 있겠지.



 요즘은 카페도 편하게 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상하지만서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하다. 아무리 홈카페가 유행이라 한들 그래도 커피는 남이 타주는 게 쪼금 더 맛있고 원하는 분위기 안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의 환기가 되는데 그걸 못하고 있다. 어서 이 상황이 나아져서 다시 한번 스타벅스에서 필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김애란 작가, 은유 작가의 수많은 문장이 내 손을 기다리고, 내 안에 넘쳐흐르는 문장도 갈 곳을 찾고 있다.

 



지금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어.

가만히 있지 않아.

더 나아지고 싶어 노력하고 있어.

혼자이고 싶은데 혼자이기 싫어.



라고 말하고 싶을 때.

스타벅스에서 필사를 시작했던  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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