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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r 08. 2021

나는 작은 일을 합니다



“정 기자, 그 교수님한테 원고 청탁하고 김 원장님 인터뷰 준비해요.”


 매주 월요일 아침 회의 시간은 늘 곤욕스러웠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 사수 없는 업무를 스스로 진행하는 일은 책임감도 책임감이지만 일자체가 무서워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나는 어쩌다 의학전문잡지 기자로 들어가 에디터 일도 하면서 하루하루 경력을 쌓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었던 사수가 나와 6개월도 같이 일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의 나는 모든 것이 어렵고 불편하고 막막한 채로 주어진 일을 눈치껏 해결하는 하루살이 같은 회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달 한 권의 의학전문잡지가 만들어지려면 원고를 써줄 저자를 섭외하고 원고를 받아야 한다. 일단 이 과정에서부터 현직 대학병원의 교수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진료시간을 확인하고 찾아가 외래 대기실에서 환자도 아닌 채로 앉아 기다린다. 운이 좋으면 진료를 끝내고 방에서 나올 때 인사드리고 조심스레 원고 작성을 부탁드리면 흔쾌히 해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여러 수를 준비해 둬야 한다.


 내가 해본 끝판왕 섭외는 무뚝뚝한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겨우겨우 물어 의국을 찾아 섭외 원고와 간략한 쪽지를 남겨 방문 밑으로 쏘옥 넣고 온 일이다. 낯선 곳에서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며 찾아간 그곳은 참 외로운 공간으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덜덜 떨며 교수님이 화를 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상황을 머리에 그려 넣으면서까지 찾아간 이유는, 어떻게든 섭외 요청을 했다는 말 한마디를 국장님께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노력하고 있다고. 잘 해내고 싶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몇 번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교수님에게 접근하고 무슨 말로 부탁드려야 하는지 배우기도 했지만 쉽게 말하면 그냥 공손하게 굽실거리는 게 전부였다. 잡지가 이름이라도 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렇지도 못한 영세 출판소 작은 의학잡지였다. 대기실에 있다 보면 환자 말고 나같이 교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는데 바로 제약회사 직원이다. 그들보다는 좀 더 당당하게 우리는 앞으로 의학계를 이끌어나갈 후배들을 위해 당신의 좋은 글을 원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내가 느끼는 상당의 부끄러움과 어쩌면 있었을 수치심까지도 원고 섭외 과정 중 하나였다.


 나는 사무실에서 청탁 전화를 하기가 너무 부끄러워(다른 직원들이 들을까 봐서..) 포스트잇에 전화번호를 적고 휴대폰을 챙겨 사무실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몇 통의 전화를 돌린 적도 많았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쑥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25세의 신입직원이 평균 55세의 배테랑 현직 병원 교수와 원장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뭔가 교양 있는 척, 진중하고 유식한 척을 해야 할 것 같은 고정된 생각 때문에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더 공부하려는 생각은 못하고 계속 움츠리기만 했던 것 같다.


 더불어 사무실에서도 기 센 디자인 팀장과 조화를 이루려면 클라이언트 생각과 철학을 잘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다. 무명의 작은 의학전문잡지 회사에 그런 체계적 교육시스템이 있을 리 만무했고 그저 각자도생. 다들 제자리에서 버텨내기 급급한 모습만 서서히 닮고 있었다.


 그래도 그 스물다섯 살이 나쁘지만은 않게 기억되는 건 혼자여서 더 열심히 해보려는 타의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고 해보고 싶었던 일을 열심히 했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맡은 바, 내가 한 일을 최고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태백산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병원의 원장을 인터뷰하러 가기 위해 혼자 카메라와 노트북을 챙겨 편도 4시간 기차를 타고 가면서 종이 위에 인터뷰 질문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도착했던 어느 날. 안개 낀 태백산 풍경은 입이 떡 벌어지게 좋았을지 몰라도 병원은 시골스러운 분위기 그 자체였다. 1명의 원장님과 6명의 간호사분들과 로비에서 사진 한 방을 찍고 서울로 다시 오던 길. 이 사진 한 컷과 인터뷰 기사 1 페이지를 위해 어깨 빠져가면서 짐을 바리바리 쌌다. 사실 그때는 인터넷 기사도 활발하지 않아서 종이 잡지 구독률이 더 높을 때였고 그마저도 유명하지 않으니 아마 내가 그날 찍고 쓴 인터뷰 기사를 본 사람은... 10명이나 되었을까?


 그런데도 그때는 그 일이 너무도 중요하고 크게 여겨져 내가 해내지 못하면 회사가 망할 것처럼 열심히 했다. 심포지엄과 인터뷰 사진 하나도 잘 찍고 싶어 셔터를 얼마나 눌러댔는지. 원고 하나를 쓰기 위해 여기저기 자료를 수집하고 버리면서 결국 마음에 드는 글 하나를 쓰지 못했지만 매달 마감을 지켜냈고 어쨌든 이번 달도 해냈다는 안도감으로 일을 했다. 성취감 대신 이 다행스러움마저 없었더라면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버틸 순 없었을 거다.


 하지만 결국 그 회사를 그만둔 건 여전한 심리적 압박 때문이었다. 마음 맞는 동료 하나 없이 일한 것도 있지만 점점 늘어나는 잡지의 개수와 에디터의 역할 사이에서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렸다. 노교수의 말 한마디에 휘둘리는 담당자를 만나면 겨우 만들어 놓은 책의 콘셉트를 일주일 만에 모조리 바꿔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그럼 디자인팀과 영업팀도 덩달아 개고생이다. 양쪽에 잘 설명하고 서로 원하는 기대에 맞게끔 설득하는 일이 나의 포지션이었지만 능력이 너무도 부족했던 거다. 메일 하나를 보낼 때도 10번은 확인해가면서 고민을 더했을 내가 주도적으로 심포지엄을 집행하고 책을 만들어 내는 일이 굉장히 무섭고 큰 것처럼 다가와 늘 온몸이 무거웠다. 훨씬 멋지게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며 떠나고 싶었지만 쫓기듯 비행기표 하나만 끊어 놓은 채 이 일에 실패했다는 자괴감마저 못 본 척하고 곧 퇴사하고 말았다.



 이제 나는 서른여섯 살이 되었고 여전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런 유리 같은 마음으로 아직까지 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대견한 일이 아닌가 스스로 칭찬 아닌 칭찬도 하지만 아마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유연해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는 ‘일’ 자체를 내 인생 전부로 생각하지 않고 다르게 여길 줄 알게 된 덕분이다. 예전에는 상사에게 혼나기 싫어서 악착같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가면 일을 했다면 지금은 좀 더 유연하고 비우는 마음으로 주문을 외운다.


나는 작은 일을 합니다



 내가 느꼈던 부담과 불안은 나 스스로 만들어 낸 ‘크고 중요한 일’이라는 프레임이었다. “내가 못 하면 안 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니 일은 일대로 시원하지 못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불편했다. 그래서 두 개의 회사를 거치며 조금씩 다양한 일을 하면서 이룬 다짐은 ‘티 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직업상 마케팅 분야에 있으면서도 내가 한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한다는 게 어불성설인 것 같아 보여도 이런 직군에서 일할수록 머리와 마음에서 숫자와 관심을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공감, 하트, 팔로워, 댓글의 수치에 집착할수록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일이 나를 잡아먹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물론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이야 너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마케터가 수두룩이고 소비자에게 영원히 남는 메시지는 없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른 시대에서는.


 

 새롭게 오픈하는 진료과 홍보를 앞두고 온갖 마케팅 전략을 준비한다. 블로그, 카페, 포스트, 인스타, 페이스북, 카카오까지 모든 채널을 놓치지 않겠노라 벼르며 메인 카피를 잡고 디자인을 하지만 이걸로 모든 환자를 우리 병원에 데리고 오겠다는 유치한(?) 바람은 섞지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건 지금 이 진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내가 쓴 게시글이 적재적소에서 발견되어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그저 내 일을 하고 있을 뿐 언젠가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나의 글이 가 닿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한 가지 믿음이 지금까지 내가 기꺼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다. 일하는 과정에 충실하고 내가 해 볼 수 있는 역량을 다할 뿐 결과는 운과 하늘에 맡긴다.


 몇 주 전 방송 <유 퀴즈>에서 [언성, 보이지 않는 영웅] 편에 나온 피아노 조율사 이종열 님의 인터뷰를 보았다.


 연주자가 찬사 받는 것을 부러워하고 기대하면 본인의 일이 슬퍼질까 봐 그저 묵묵하게 피아노의 조율을 잘하는 것으로 만족한 삶을 사셨다는 이종열 님. 처음으로 연주자 지메르만이 연주 후 본인을 불러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었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으셨다고.


 피아노 조율이란 직업도 낯설었지만 그분의 겸손하면서도 생각이 단단한 대화를 듣고 있노라니 80세에 현역으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면서 또 얼마나 작은 일인가 생각도 들었다. 아마 이런 방송이 아니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평생 알 수 없었을 한 명의 조율사셨을 뿐이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아노를 만지고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영광 뒤에서 함께 박수를 쳤을 그의 마음에서 티 내지 않고 겸손히 나의 할 일을 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얼핏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일에서뿐만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심정도 마찬가지다.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을 땐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누군가에게 작디작은 위로가 되길 바랐었다. 유명한 작가가 아닌 보통의 사람에게 나도 그렇게 위로를 받았던 때가 많았으니까.


 새벽녘 잠이 안 올 때 싸이월드나 블로그에서 무명의 사람이 쓴 진심 어린 글에 조용한 위안을 얻곤 했다. 잘 나가는 친구에게 질투가 났을 때, 뭘 해도 안 되는 때가 있었을 때, 서류전형에서 매일 탈락했을 때. 검색으로 시작한 정보 습득의 글도 있었지만 결국 내 마음에 남은 것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느꼈던 날것의 감정들과 그걸 기록해 놓은 이야기였다.


아마 그들은 몰랐을 거다. 언제 적어 놓은지도 모를 당신의 이야기가 저 멀리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글이 되었다는 걸.


나 또한 혹시나 나의 글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잠시나마 위로가 되거나 작은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에, 오늘도 이렇게 작은 이야기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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