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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Sep 22. 2020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엄청 용감해질 수 있어


학과 시간에 머리를 동동 굴리며 광고 카피를 써냈지만 별게 없었다. 광고 회사에 취업하려면 상상력은 필수였는데 크리에이티브한 반전을 가지고 독특한 상업 광고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곧 취업에 강한 한방이었어도, 결국 내게 없는 한방이기도 해서 이력서를 낸 광고 회사마다 톡톡 떨어졌다.


아이디어를 짜려고 하면 그게 쓰레기 같을까 봐 지레 겁부터 먹었고, 공모전 준비도 하기 전에 입상조차 못할까 상상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나의 취준 시절.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일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게 상상이라는데 어쩐지 나는 늘 무섭고 두려운 생각만 하게 됐다. 안 되고, 할 수 없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계획하여 심지어 그게 현실인 것처럼 믿어 버리고야 만 것이다.


어렸을 땐 창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꽤 매력적인 일이어서 파란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수행평가 점수가 매겨졌고, 그 성적이 좋으면 상상력이 좋은 학생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은 결코 그렇게 점수로 환산되는 게 아니고 삶과 일상에서 나를 지키거나 방어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법. 하필 나에게는 '제한'이 돼버린 게 문제였다.


나는 스스로 상상력이 없는, 부정적인 생각만 할 줄 아는 사람이라 믿었다. 자고로 상상이라고 하면 빨갛고 노랑 풍선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가는 그런 아름다운 동화 속 세계로 가는 길 같은 거여야 했는데 나는 누가 바늘로 콕 풍선을 찌를까 봐 겁부터 내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상상력이라는 밝고 긍정적인 단어가 그렇게 쓰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무한도전 프로그램을 보고서야 알았다.


멤버들의 눈을 막고 귀를 속이며 헬리콥터에 오르게 한 다음 다짜고짜 뛰어내리게 하는 실험이었는데, 실은 바닥에서 한 50cm 떴을까? 하지만 시각이 막힌 채 청각과 후각, 분위기가 높은 하늘에서 뛰어내린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그런 공감각이 뇌에 장착됐을 것이다. 다들 무섭다고, 뛰어내리기 싫다며 발버둥 거리면서 뒤에서 미는 순간.


또 한 번은 멤버들을 컨테이너 박스에 가두고 문제를 내어 틀리면 몇 미터씩 올리는 거였는데, 실은 마찬가지로 바닥에서 몇 미터 뜨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니터로 보이는 현재의 모습이 컨테이너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화면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리 없는 멤버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고 제 자리에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이었는데.. 마치 진짜인 것처럼 무서워했고, 겁에 질린 것이다.


상상은 내가 믿는 것일 뿐



프로그램 말미에 남겨진 문구가 마음에 크게 남았었다.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엄청 용감해질 수 있어."


다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오히려 상상력이 용기를 줄어들게 한다니..!


그동안 나만 제대로 된 상상을 못 해 괴로웠던 게 아니었다. 다들 나랑 비슷하다 이거지? 그러니까 더 이상 상상을 잘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집착하지 않아도 됐고 오히려 이 나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바꾸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내 경우엔 긍정적인 상상보단 부정적인 상상이 훨~씬 힘이 셌다.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시험 전엔 꼭 삑사리가 나는 지점만 계속 생각나고 연습할수록 더 움츠러들게 만드는 주문이 되어 버렸다. 매끄럽게 부르고 잘 마치는 상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마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더 이상 나쁜 상상에 나를 건네주기 싫었다. 나의 마음과 생각, 감정을 그들에게 통째로 줘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거 없이 늘 그 자리만 맴돌아야 했기에 이왕이면 좋은 상상에 먹이를 주고 싶었다. 그마저도 힘들면 아예 생각이란 걸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습관적으로 생긴 나의 상상 장면을 소개해 볼까 한다.


#1

어색한 상황, 막막한 벽 앞에 놓여 있는 내가 시간이 빨리 가길 원할 때 늘 하는 생각이 바로 '기계가 영수증을 쉴 새 없이 토해내고 있는 장면'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이미지가 필요한 순간. 시계 초침도 1초 사이에서는 잠깐 멈추고 있는 게 보여 끊임없이 뭔가 움직이고 있는 상상이 절실했다. 왜 영수증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수증이 주르르르 계속 나오고 있는 생각을 하면 시간이 멈춰있지 않고 그들의 일대로 쉼 없이 지나간다는 확신이 들면서 곧 이 상황도 끝이 날거라 안심하게 된다.


#2

잠자리에 누웠을 때, 아무 일 없이 그냥 있을 땐 꼭 나쁜 생각이 든다. 남편이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이상한 사람이랑 시비 붙으면? 갑자기 아플 땐?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쓸데없는 존재들이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으면 ‘가래떡을 뽑고 중식 칼로 싹둑 써는’ 상상을 한다. 왜 처음부터 이런 장면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는 가래떡을 딱 썰어 내듯 나쁜 생각을 함께 잘라버리고 마음속으로 '끝' 하고 외친다. 반복할수록 효과가 좋다. 안 좋은 생각을 멈추고 뽀얀 연기가 나는 가래떡에만 집중하면 머리가 전환되면서 몸 안을 흐르던 부정적 기운이 몸 밖을 벗어나는 기분이 든다. 중요한 건 계속 이미지를 반복하는 거다. 또 생각나면 딱 자르고, 생각나면 또 딱 자르고.


딱 딱 딱.


#3

결혼 초기 부부싸움을 하고 가장 많이 한 상상도 있다. 말싸움을 하다 서로 화가 나서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면 나는 나대로 침대에 와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나의 세계로 간다. 그곳은 작은 마당이 있는 집.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정원에 꽃을 심기 위해 흙을 만지고 모종을 정리하고 물까지 뿌리는 상상이다. 중요한 건 흙의 감촉을 느끼면서 화났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일인데 오롯이 그 일만 하는 상상을 해야 분노가 차차 사그라들고 나만의 세계에서 안정을 찾아간다. 마치 두꺼비집을 짓듯 손에 흙을 포개고 또 포개면서..



내가 상상력을 이용하는 건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현실이 무섭고 두려운 감정이 들쭉날쭉할 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지그시 눌러주는 균형감이 필요했던 것. 마이너스로 휘었던 감정을 플러스 쪽으로 넘기기 위해 시작한 상상이, 감정 폭이 큰 나 같은 사람을 겨우 겨우 '0'의 중립 상태로 만드는 방법이었던 거다.


나는 상상을 통해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애를 썼다.


팀장한테 엄청 깨지고 나선 ‘나는 바위다, 아무 생각이 없는 바위다’ 주문을 걸면서 정말 내가 바위인 상상을 하면 일에 투영된 섭섭한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괜히 신경 쓰이는 이상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양팔을 벌려 거리를 유지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으려 한 나만의 무던한 노력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상상은 예민한 나를 방어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거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최악의 상상을 버리고 취한 나의 가장 현실적인 계획이기도 해서 내 안의 널뛰는 말을 진정시킬 한 방법이 되었다.


엄청 용감해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더 이상 불안한 상황에 나를 밀어 넣고 싶지 않고, 생활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살피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것도 용감이라면 용감일 수도 있을까?


살아보니 나를 사랑하고, 신경 쓰고, 기분 맞추는 일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말은 참 쉽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세요. 스스로를 사랑합시다.라는 캠페인 같은 말들.


하지만 우리는 안다. 타인을 좋아하긴 쉬워도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건 어떻게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방법도 없는 것 같다는 걸.


노력 없이 쉽게 얻기 힘들걸 알면서도 ‘나를 사랑하라’는 문장을 되뇌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운명의 여신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순례자가 되어 상상의 세계를 걸어 보기로 했다. 늘 내게만 가혹한 것 같은 이 여신에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만나러 가보자는 다짐이다.


벼랑 끝에 선 상상 말고 그 끝에 뒤돌아 걷는 나를 꾸준히 상상해 보자고.


상상은 나를 사랑해 볼 수 있는 작은 방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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