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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y 17. 2019

중요한 것은 레드벨벳이 아니었음을

가평 자라섬 여행, 이슬라이브 페스티벌

  난민촌만큼이나 다닥다닥 붙어있는 인구 과밀의 텐트존에 들어서자마자 직감했다. 집에 가고 싶을 것 같다고. 환한 그녀의 미소에 붙은 한 점의 불안함을 보며 2인용 원터치 텐트를 허공에 던졌다.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텐트. 봉인되어 있던 탄성을 분출하며 스테인리스 폴대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직감했다. 곧 집에 가겠구나 하고.

  


  

  1.

  가을이면 발 닿는 곳마다 재즈가 울려 퍼지는 그 섬에서 새로운 뮤직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미 여름마다 EDM 페스티벌을 열고 있는 한 주류 회사는 사계절을 온통 자기네 축제로 장식하고 싶은 모양인지 섬에서 축제를 열었다. 자사의 브랜드를 조악하게 이름 붙인 축제를 위해 가을에나 발길을 들일 줄 알았던 그 섬을 봄에 오게 되었다. 음악을 사랑하고 나들이를 애정 하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페스티벌은 아이돌과 대중 가수로 꾸려졌다. 아이돌만 놓으면 좀 그랬는지 힙합과 레게와 발라드를 양념처럼 뿌려놓았다. 라인업 대부분에 관심이 없었지만 라인업의 마지막 순서가 몹시 기대됐다. 페스티벌을 한 주 앞두고 우리는 얼마나 설렜던지! 피날레는 레드벨벳이었다.

  


  2.

  여름이 한 달 남은 5월은 이미 볕이 뜨거웠다. 레드벨벳은 마지막에 나올 것이고 여러모로 일찍 가야 할 이유가 없어서 그녀와 나는 여유를 부렸다. 돗자리 위에 한상 차려 놓을 음식들을 장보고 나오니 이미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행사장에 들어갈 사람들은 이미 다 들어가 있을 것이고 우리는 유유히 티켓을 끊고 느지막이 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간혹 부는 바람엔 여름의 예감이 가득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야.

  

  왠지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고 네비는 몇 번이나 코스를 바꾸어가며 길을 안내했지만 대수로울 것 없었다. 1시간 20분 정도를 달렸을까. 그 섬과 페스티벌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도 나도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앞 일은 까맣게 알지 못했다.

  

Getty image


  3.

  줄이 끝도 없이 서 있었다. 끝도 없다는 건 식상한 비유고 진실도 아니었지만 정말 줄의 끝이 한눈에 담기지 않기는 했다. 마련된 네 곳의 주차장이 모두 만차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차는 이차선 도로 위에 겨우 세워 놓았다. 마찬가지 신세인 차들이 도로 양쪽으로 얌전히 서 있었다. 신난 주인들을 섬으로 들여보내고 차들은 끈기 있는 표정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도로 위에서 보닛이 끓어오를 듯 달구어져 있었지만 차들은 개의치 않았다. 날이 저물어 끓어오르던 열기가 차갑게 식고 나면 곧 주인들이 돌아오리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준비가 철저한 그녀의 은색 캐리어를 끌고 섬으로 들어갔다. 예매권을 교환하기 위해 피난길처럼 길게 늘어선 줄의 끝에 합류했다. 앞에는 아주 가벼운 옷차림을 한 남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리의 뒤에는 챙이 긴 모자를 쓴 커플이 양산을 들고 섰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줄에 선 사람들의 옆얼굴에 붉은빛을 드리웠다.

  

  볼이 뜨끈하게 익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풍성한 정수리 위로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얼마나 서 있어야 할까? 그녀도 나도 앞 뒤로 선 커플들도 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한 시간 뒤에나 겨우 끝이 난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4.

  줄의 끝에서 예매권을 교환하고 손목 띠를 받았다.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받아낸 '성물'을 손목에 두르고 행사장으로 발길을 재우쳤다. 해는 이제 많이 저물어서 붉은 피 같은 석양을 길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긴 대열을 이룬 채로 우루르 몰려갔다. 페스티벌에 참가한 여성 듀오의 노래가 들리다 끝이 났다. 이제 1부가 끝나고 1시간의 쉬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도착한 행사장은 무대를 시작으로 스탠딩 존, 돗자리 존, 텐트 존이 순서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난민촌만큼이나 조밀하게 붙어 있는 인구 과밀의 텐트 존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어디에도 우리가 차지할 공간은 없었다. 이미 수많은 텐트들이 초면의 사람들과 입구를 면한 채로 붙어서 존(zone)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기 위해 먼저 달려 나갔던 그녀의 파란 셔츠가 보였다. 커다란 텐트 사이 기적처럼 생겨난 공간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형 텐트 세 채가 들어서면서 우연찮게 만들어진 자투리 공간인 모양이었다. 그녀도 영 탐탁지 않은지 자리를 찾아낸 의기양양한 표정 대신 한 점 아쉬움이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2인용 원터치 텐트를 허공에 던졌다. 까만 고무줄에 위태롭게 봉인되어 있던 탄성이 분출하면서 텐트가 공중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빈약한 새 뼈다귀 같은 '팩'을 네 귀퉁이에 나누어 박고 돗자리를 안에 깔았다.

  

  이로서 오늘 페스티벌의 남은 시간을 함께 할 우리의 보금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건축된 아파트 단지들 옆에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선 임대주택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녀와 함께 바람을 피하고 음악만 들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잠시 뿌듯한 마음으로 텐트를 바라보다 한 손 가득 봐온 장거리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Getty image


  5.

  축축하고 꺼끌꺼끌한 잔디가 그대로 느껴지는 바닥에 적당히 엉덩이를 비비고 앉았다. 재즈 페스티벌 때와는 다르게 주최 측에서 간이형 종이 의자를 나누어 주지 않아서 허리를 자력으로 세우고 앉아야 했다. 장을 봐온 닭 강정과 초밥을 바닥에 깔고 몇 개 집어 먹었을 때 2부의 첫 번째 팀이 무대에 올라왔다.

  

  순간 끓어오르는 열기. 주변 텐트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보러 무대 앞으로 뛰쳐나갔다. 스피커는 섬 전체를 울릴 듯 쩌렁쩌렁 포효했고 그녀마저 엉덩이를 들썩이며 나가고 싶어 안달을 냈다. 화려한 안무가 시작되고 이윽고 팀의 리드 보컬이 입을 떼어 첫 소절을 불렀다. 노래는 AR이었다.

  


  6.

  아아. 서울에서부터 차를 몰아 섬까지 온 것은 레드벨벳을 보기 위해서도 음악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AR 반주에 시답잖은 안무를 추는 댄스 가수를 보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여행의 목적은 오직 지금 옆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 그녀였다. 불편한 자리 때문에 허리를 곤두 세우고 목이 결리기 시작했는지 좌우로 갸우뚱 거리는 이 귀여운 사람 때문이었다. 서늘해진 바람이 머리 끝을 살랑거리고 가사를 알 수 없는 음악이 텐트 벽을 가볍게 울렸다. 나는 여행의 원래 목적을 기억해냈다.

  

  그만 가자. 어서 이 난민촌을 벗어나자. 따뜻한 물에 깨끗이 씻고 더 늦게 전에 우리의 여행을 새롭게 시작하자. 1시간 반을 운전하고 1시간을 줄 선 끝에 이제 자리에 앉은 지 겨우 30분이 지났지만 결심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더 오래 인내할수록 그녀와의 시간이 더 짧아질 뿐이었다.



  7.

  섬을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늘은 저무는 해가 드리운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맞은편에서 우리보다 더 늦게 도착한 커플이 걸어오고 있었다. 장 돗자리를 어깨에 맨 남자와 배가 불룩한 에코백을 든 여자의 얼굴은 밝았다. 빠른 발걸음으로 섬을 나오는 우리를 남자가 흘낏 쳐다보았다.

  

  3시간 가까이 걸려 들어온 섬을 30분 만에 빠져나가는 우리의 사정을 알까?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될 진짜 여행에 마음이 온통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까? 뒤에 남은 섬에서 2부 두 번째 가수의 등장을 알리는 음악이 울렸다. 우리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Getty image



※ 정작 페스티벌에 대한 사진은 거의 찍지 못하였기에 Getty image로 대체합니다.

※ 이미지의 사용에는 과장이 섞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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