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재형 Jul 15. 2019

둘이 걸을 때 훨씬 좋은 길

낙산 야행

  누구는 카메라를 받침대에 세워 고정한 채 연인의 모습을 담기에 바빴고 누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조금만 고개를 까닥여도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채 '밀어'를 속삭였다.

  

  아직 사랑을 얻지 못한 이는 낙산의 야경을 빌미로 무던히 노력했고 아직 사랑하지 않는 이는 발아래 깔린 야경과 그 위의 사람들이 빚어내는 농밀한 공기에 이제는 마음을 주어볼까 마음먹었다.

  

  이미 마음속 깊이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 같은 이는 맞잡은 손깍지를 더욱 꼭 붙들며 애정 어린 공기의 농도를 더욱 짙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1. 다시 찾은 낙산

  

  두 번째 낙산 나들이. 이번엔 밤에 올라갔다. 첫 번째 낙산 산책에 대한 이야기는 매거진 『세상 사소한 여행기』 첫 장에 올려져 있으니 한번 보시는 것도 좋을 텐데요. (소심)

  

  지난번 낙산에 올랐던 것과 이번에 올라간 것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지난번에 낮에 혼자서, 이번엔 밤에 둘이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아주 다른 경험이었다. 앞에는 그저 10이라는 아라비아 숫자가 무미건조하게 박혀 있다면 뒷면에는 여러 가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보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식이다. 다보탑 안에 아이의 시체가 들어있다는 괴담은 다들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그런 험악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낮과 밤이 다르고 내 곁에 누군가 동행해 준 것 만으로 같은 길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의 손을 잡고 밤에 오른 낙산은 낮의 낙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서적으로 풍부하고 농밀한 시간이었다.

  


  2. 밤에 오른 낙산

    

  낙산은 낮보다 밤에 훨씬 좋다고들 한다.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 낮의 낙산만 경험한 나는 입술을 빼죽 내밀며 '흥, 낮에도 얼마든지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다구' 하며 툴툴댔지만 한편으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라라 랜드(LA LA LAND)'가 개봉하고 난 뒤엔 더욱 궁금해졌다. 주변에서 한국의 라라 랜드는 낙산공원이라고 얘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낙산은 정말로 밤에 더 좋다. 단, 같이 걸을 사랑하는 (혹은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만.

  

  밤에는 아무래도 시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보이는 것은 까만 밤하늘과 빨갛고 노랗고 하얗게 빛나는 도시의 인공 불빛뿐이다. 길을 따라 노란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도로 위에 줄지어 늘어선 차들은 빨간 브레이크 등을 반딧불처럼 깜빡깜빡 반짝인다. 금요일 밤을 기리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아직 퇴근하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의 사무실 형광등이 하얗게 어우러진다.

  

  분명히 매력적인 광경이지만 그렇다고 서울의 도심이 구석구석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낮의 전경보다 좋다고 할 순 없다.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취향에 따라 갈릴 부분이다. 하지만 낙산의 밤이 더 낫다고 느꼈던 것은 공원 위를 가득 채운 커플들이 뿜어내는 정서적 농밀함 때문이었다. 커플들은 얼굴을 맞댄 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눈빛으로는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3. 둘이 오른 낙산

  

  전에 낙산을 올랐을 때는 여름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고 팔이 짧은 피케 셔츠를 입고도 등 뒤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직 더운 공기에 익숙해지지 않은 몸으로 헉헉거리며 산성길을 오르다 보면 눈부신 여름 햇살이 발 밑을 비추고 이름 모를 새가 높은 음색으로 지저귀었다. 사람이 드문 산책로를 걷다 잠시 서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저 멀리 도로 위를 메운 차 소리가 물에 잠긴 듯 아득하게 들려왔다. 발 밑을 비추던 햇빛의 색깔과 귓가에 들려오던 새소리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 나는 혼자였다. 묵언 수행하듯 묵묵히 길을 걷고 꾹 다문 입으로 사진을 찍을 뿐 나는 혼자였다. 걸음이 들뜰 만큼 마음이 설레었지만 그 기분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었다면 훨씬 즐거웠을 것이다.

  

  이번엔 그녀가 내 곁에 있었다. 산책로 위에 가득한 커플들의 농밀한 정서적 교감에 가담할 수 있는, 우리도 커플이었다. 한층 짙고 끈적한 공기를 피워주마, 굳이 다짐하지 않았도 쉽사리 가능한 다정한 연인이었다. 


  

  4. 내려오는 길

  

  이화 벽화마을로 내려왔던 여름과는 달리 이번엔 한성대 입구 방향으로 내려왔다. 구비구비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젊은 남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작은 공방이었다.

  

  손가락과 이마에 얼룩덜룩 물감을 묻힌 그들은 벽 너머까지 넘어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정보를 차단당한 휴전선처럼 벽을 넘지 못했지만 웃음소리만큼은 골목 구석구석을 넘나들었다. 낙산의 커플들처럼 농밀하지는 않았지만 애정과 우정이 환하게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그들의 웃음에 화답하듯 어디선가 어린 개가 컹컹 짖었다.

  

  노란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는 골목길을 내려오며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저 멀리 한성대 입구 역의 빛이 환하게 빛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요한 것은 레드벨벳이 아니었음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