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여행
진눈깨비에 우박, 천둥까지 치며 요란했던 날씨가 잠잠해졌다. 단지 조금 억울한 듯 하늘은 잔뜩 일그러진 울상을 짓고 있었다. 봄인데, 봄인데! 회색 하늘에 뜬 잿빛 구름이 찌푸린 얼굴로 요동쳤다. 오늘은 이런 하늘 아래에서 운전을 해야 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홍천의 결혼식. 내가 아는 지인과 그의 신랑은 강원도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두 강원도 사람은 결국 식을 강원도에서 올리기로 결정했다. 찌뿌둥한 하늘과 불길한 방향으로 흐르는 구름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운전대를 잡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적 코스는 양양고속도로였다. 7,700원만 내면 1시간 2분 만에 홍천까지 쾌속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 '내비'의 의견이었다. 종종 막다른 길로 안내하고 공사장으로 막혀서 갈 수 없는 길을 어서 지나가라며 종용하는 '그녀'이기에 좀 떨떠름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에 설치된 '순정 내비'이신 그녀를 난 가급적 믿는 편이었다. 가끔은 돌무더기로 꽝꽝 막힌 세계의 끝 같은 길로 이끌어놓고 활짝 웃는 그녀이지만, 우린 그럭저럭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바꾸어 국도를 최적의 길로 제시하고 있었다.
"왜?"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요?" 그녀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국도야? 어제까지만 해도 고속도로랬잖아. 국도로 가면 20분이나 돌아가야 하는 걸."
"눈이 왔잖아요, 어제. 같이 보셔놓고 이러신다. 아마 길이 꽁꽁 얼었을 거예요. 제 말 들으세요."
"그럼 진즉에 얘기했어야지. 그럼 더 일찍 일어났을 거 아냐. 너만 믿고 20분이나 더 잤단 말이야."
"그걸 왜 제게 뭐라 하세요? 주인님이 게으르신 것을. 투덜댈 시간에 지금이라도 출발하시죠?"
당혹감에 눈을 흘겨보지만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담히 20분이나 추가된 예정 시간을 LCD 모니터에 비쳐 보일 뿐. 조금 냉기가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국도의 이름은 경강로였다. 경강로(京江路)라는 이름을 보면 서울과 강릉을 잇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강로는 경기도 남양주 시와 강릉을 잇는 길이었다. 이름부터 뭔가 꿍꿍이 속이 잔뜩 있는 듯한 도로를 의심쩍은 마음으로 발을 디뎠다. 일단 국도를 선택하고 나자 그녀는 차분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대신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은지 조금 텐션이 올라간 상태였는데
"다음 도로에서 오른쪽 두 번째 차선을 이용하세요."
"오른쪽 두 번째...... 알겠어."
"갈림길에서 왼쪽 차선을 이용하세요. 다음은 오른쪽입니다."
"알았어. 복잡하네 좀."
"왼쪽에서 오른쪽. 그리고 다시 오른쪽 길입니다. 다른 길로 빠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하나씩만 얘기해! 여기 처음 와서 헷갈린다고!"
"저한테 소리 지르시는 거예요? 표지판 보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따라가시면 되잖아요. 친절하게 도로도 그려드리잖아요. 쓰.리.디.로."
"운전하면서 보기 힘들단 말이야. 난 눈이 두 개뿐인걸."
"삐비 빅. 경로를 재수정합니다."
"아악!"
경강로로 접어드는 길은 조금 복잡했다. 빠지는 길 없이 쭉 직진만 하는 도로로 들어서기까지 그녀와 나는 계속 반목하며 차를 몰았다.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초보운전 스티커 다시 붙이시는 게 어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작은 조금 난감했지만 경강로를 달리는 시간은 즐거웠다. 어제 내린 눈들은 모두 녹아서 길도 다행히 미끄럽지 않았다. 대신 길 좌우로 우뚝 솟은 산의 나무 위에 내린 눈들이 그대로 남아 은빛의 병풍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멀리 쭉 뻗은 길 위의 소실점으로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도로 위를 구르는 차 소리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듯 고요했다. 직선의 길에선 그녀도 별로 알려줄 것이 없어 잠잠했다. 아까 소리 지른 것이 미안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는 미안했어."
"......" 그녀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별 말이 없다.
"네 딴엔 날씨도 봐가면서 코스를 수정해준 건데, 그것도 모르고. 이 길로 와서 좋은 것 같아. 고마워."
"...... 앞으로는 저한테 소리 지르지 말아 주세요."
"응, 다시는 안 그럴게."
"알겠어요. 초보 운전 운운한 것, 저도 미안해요."
길은 막히는 것 없이 쭉 뻗어있었다. 틀어놓았던 음악도 끈 채 고요한 백색의 국도 위를 계속 달렸다.
1시간 30여분을 달려 마침내 도착한 홍천. 작은 읍내와 같은 마을 길을 잠시 달려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젖은 자갈들이 깔린 야외 주차장에 그녀를 두고 차에서 내렸다. 멀리서 달려온 듯한 차들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얌전히 서 있었다. 어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던 눈송이가 장작이 타는 소리를 내며 녹아 떨어졌다. 하늘은 말개진 회색빛이 되었고 그 위를 잿빛 구름이 잔잔히 흘러갔다.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이제는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짚어 돌아가는 일만이 남았다. 주차장의 다른 차들도 시끌벅적 내비게이션과 얘기를 나누며 하나씩 자리를 떠났다.
"돌아가는 길에는 군말 없이 모두 말 들을게." 차 보닛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좋아요. 고속도로는 여전히 얼어있을 거예요." 기분이 풀어졌는지 도착 예정 시간은 올 때보다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니 또 국도로 달려요. 이번엔 좀 더 빠르게. 아까보다 더 빠르게. 할 수 있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