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셋째 날, 마무리
제주 여행, 셋째 날
제주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조금 일찍 일어나 왠지 옆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이 든 그녀를 가만가만 토닥이며 창 밖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란빛이 지배하던 창 밖으로 점점 노란빛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야속하지만 아름다운 아침이 오는 광경을 지켜보며 앞으로 평생 우리의 첫 번째 제주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든 그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훌쩍 코를 들이켰다.
2박 3일의 제주 여행 동안 얻은 가시적인 성과가 있다면 운전이었다. 렌터카를 찾을 때 시동키가 어딨는지도 헤맸던 생초보 운전자는 이제 제법 엑셀을 자신 있게 밟을 수 있는 새내기 드라이버가 되었다. 아직 붉은 벼슬을 치켜든 수탉이 되진 못했지만 병아리 티는 벗은 청년 닭이 된 것이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꼬꼬댁 거리며 운전대도 여유 있게 돌릴 줄 알게 된 청년 닭.
초보 운전자로서 유턴에 고속 운전, 야간 운전에 평행주차까지 치러낸 나는 오늘 아침, 마지막 관문이었던 주유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주유소 앞에서 쭈뼛거리며 "3만 원이요."라고 외쳤던 이 날을 잊지 못하리. 지붕 위에 올라 아침을 깨우는 수탉이 되어서도 제주에서의 운전을 잊지 않겠다고 어디서나 안전운전, 방어 운전하겠노라 조용히 다짐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을 먹고 나선 곳은 그녀가 여행 전 첫 손에 꼽았던 행선지, 사려니 숲길이었다. 사려니 숲길은 불길하기까지 한 선명한 푸른빛으로 녹음을 강렬하게 발산했다. 수령이 몇십 년, 어쩌면 몇 백 년은 되었을 삼나무들이 하늘에 닿을 듯 서 있었고 잔가지들은 땅을 굽어보듯 우거져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 걸린 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본 후 그녀의 손을 잡고 숲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섭도록 짙은 숲의 공기와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숲의 호흡이 서늘하게 살갗으로 와 닿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같이 숨 쉬고 있을 수억, 수십억 마리의 작은 생명체들도 함께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입으로 날아드는 날파리들이 아니더라도 이 안에 가득 찬 생명과 삶의 윤회가 걸음걸음마다 느껴졌다.
우리는 조용히 숲의 호흡을 느끼면서 그리고 우글거리는 생명의 발산을 실감하면서 계속 함께 걸었다.
용담이호 해변은 제주에서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사려니 숲길에서 북쪽으로 차를 돌리면 금방 닿을 수 있는 이 곳은 제주의 북쪽 바다였다. 이호테우, 함덕, 월정리 해변과는 또 다른 제주의 북쪽 바다는 저 너머 한반도의 모습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까만색으로 출렁거렸다. 이제 막 제주에 도착한 듯한 설레는 표정의 사람들과 곧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어딘지 쓸쓸한 표정의 사람들이 뒤섞여 바다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이로써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모두 네 곳의 바다를 보았다. 하나하나 다른 색깔의 바다와 차별적인 공기, 그리고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분위기들을 눈에 차곡차곡 담고 기억했다.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사흘 전 제주에 내렸던 그곳에서 이제는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담담했다. 물론 다음 날부터 다시 서울과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오금이 저릴 만큼 싫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무너질 만큼은 아니었다. 왜 일까? 답은 내 손에 있었다. 지금 내 오른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제주는 이제 잠시 (잠시라고 하자) 안녕이지만, 내가 잡은 이 손과의 날들은 앞으로도 계속일 테니 아쉽지가 않았다. 그녀와 손을 맞잡는 동안 나는 언제라도 제주에서처럼 행복할 테니까.
비행기가 이륙했다. 제주도가 순식간에 작아지더니 구름 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난기류에 몇 번 휘청이는가 싶더니 금방 서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첫 번째 제주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두 번째 제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