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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05. 2019

제주의 아침은 너만큼이나 싱그럽다

제주 여행, 둘째 날

제주 여행, 둘째 날

  1. 제주의 아침은 너만큼이나 싱그럽다

  

  제주의 아침이 밝았다. 캄캄한 밤길을 장님처럼 헤치고 올라올 때는 예감하지 못했던 싱그러운 아침이 눈 앞에 펼쳐졌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땅 위를 봄 햇살이 거칠 것 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밤에는 그저 어두운 장막 속에 잠긴 것처럼 느껴지던 리조트는 사실 온통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방에는 아직 그녀가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고 창 밖으로는 처음 보는 이색적인 새가 지저귄다.

  

  감동적인 제주의 아침. 나는 한껏 기지개를 켰다.

  


  2. 돌솥밥 위에 전복이 한가득

  

  제주도 여행 둘째 날의 아침 식사는 전복 돌솥밥. 그녀의 초이스에 감탄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무가 좌우로 우거진 리조트 길을 따라 식당으로 향하길 10분 여만에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초가지붕을 얹은 아담한 식당이 노란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제주의 봄 햇살은 살결을 데우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따사로웠고 그 빛을 온몸으로 내려받고 있는 초가집의 자태는 정겹고 아름다웠다. 리조트에서 가까운 입지와 예쁜 초가집, 그리고 맛에 대한 소문들이 맞물려 식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맛은 어땠을까? 20여 분의 조금 긴 기다림 끝에 먹어 본 전복 돌솥밥은 내 인생의 돌솥밥 중에 가장 맛있었다.

  



  3. 에메랄드 빛 바다에 취하다

  

  식사를 마치고 바다로 향했다. 운전은 첫날보다 확실하게 나아져 있었다. 인간의 몸은 놀라워서 자는 동안 전날 학습한 것을 스스로 체계화하고 숙련하는 과정을 거친다더니, 과연 그랬다. 운전대를 잡은 두 팔과 페달을 밟는 다리에는 어느덧 여유가 깃들어서 더 이상 긴장해서 쥐가 나는 일은 없었다. 아직까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여유도 네비게이션을 보며 길을 찾는 여유도 없어 그녀가 옆에서 도와주어야 했지만.

  

  이호테우 해변에 이어 방문한 바다는 함덕 해수욕장이었다. 함덕 해변의 바다는 그간 경험한 동, 서, 남쪽, 그 어떤 바다와도 확연히 다른 에메랄드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조금 이른 해수욕을 즐기는 인파들로 해변이 붐볐고 나와 그녀는 손을 잡은 채 해변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어릴 적엔 바다의 매력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하늘을 닮은 파란 바닷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바다의 매력은 수평선에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 닮은 모습에 이끌려 마침내 얼굴을 맞대는 한 면.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아 그녀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4. 만장굴, 서로에게 기대어 걸은 길

  

  함덕 해변을 나와 다시 해안도로에 올랐다. 원래는 다른 제주의 바다를 향하던 길이었는데 도로에서 만장굴 표지판을 보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만장굴은 세계문화유산이다.

  

  표를 끊고 서늘한 공기에 몸을 떨며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생각보다 훨씬 깊고 예상보다 훨씬 어두우며 기대보다 훨씬 웅장했다. 과연 세계문화유산이라고 감탄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굴 안을 탐험했다. 평탄한 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용암이 굳어서 난 길은 울퉁불퉁, 그 이상의 형이상학적 모양으로 발바닥을 괴롭혔다. 산책이 아니라 탐험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나와 그녀는 종종 휘청이며 서로에게 몸을 의지했다.

  

  현란한 구경거리를 기대했지만, 글쎄. 가끔씩 조명에 비치는 굴 벽의 이질적인 모습을 빼면 시종일관 어두웠다. 어둡고 축축했고 종종 무섭도록 고요했다. 혼자 왔으면 잔뜩 위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길 기대했지만 자연은 종종 인간이 기대하는 미(美)와 동떨어진 모습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푸르죽죽한 굴 벽은 팔방으로 우리를 둘러싼 채 시각과 후각을 빼앗고 스스로 골라 허용한 소리로 우리의 청각을 지배했으니, 굴 안을 울리는 공기의 진동과 퐁당이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5. 붉게 물든 제주 하늘

  

  이틀 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제주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해변 도로 곳곳에 차들이 멈춰 서고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와 바다 멀리 저무는 해에 넋을 잃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바다 너머 번져오는 노을빛을 바라보았다. 차창 밖에서부터 끼쳐 드는 붉은 석양이 그녀의 고개 돌린 볼에 물들었다. 그녀는 석양을 보고 나는 그녀와 석양을 함께 보고, 시간은 노을 아래 잠시 멈추었다.


  이렇게 제주의 이틀 째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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