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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03. 2019

제주에 둘이 오다

제주 여행, 첫째 날

  0. 우리는 오늘 제주도에 간다

  

  김포 공항은 지하철 역사 같았다. 머릿속 고정관념과 모습이 많이 달라서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이런 곳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는 것이 (실례되게도) 믿기지 않았다. 우리가 탈 비행기가 여기 있다는 것은 더욱 실감 나지 않았다. 바보처럼 오똑 카니 서 있는 나를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쳐갔다. 캐리어를 하나씩 손에 쥔 채 행복에 들뜬 미소를 띠고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여전히 의아한 마음으로 가만히 선 내게 그녀가 다가와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오늘 우리가 제주에 간다는 것을 실감한다. 우리는 오늘 제주도에 간다.

  


  1. 여기가 제주도입니까?

  

  한 쪽에 세 개씩 총 6개의 좌석이 나란히 놓인 몹시 협소한 공간. 손을 마음 놓고 쭉 뻗으면 왠지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드는. 저가 항공기를 처음 타는 느낌은 바로 이랬다. 그러나 작다 한들, 비행기다. 철로 만든 크고 무거운 새가 발돋움 몇 번에 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도로와 빌딩과 차들이 미니어처처럼 작아지더니 금방 바다가 펼쳐졌다. 솜털 같은 구름이 발밑에 깔렸다. 8년 만에 비행기를 타서 긴장한 마음을 숨기려고 그녀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제주도가 처음이었다. 공항 게이트를 지나면서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항 바깥에 심어진 야자수를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가 제주도구나. 감격하는 나를 보며 야자수도 반갑다며 몸을 흔들었다.

  


  2. 네, 초보운전입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업체로 이동했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너 나 할 것 없이 흰색으로 도색된 차량들이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예약 확인을 하고 우리가 고른 차 앞에 가서 섰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에 고급스러운 검정 띠를 시크하게 두른 그녀. 쏘울이었다.

  

  어릴 적 나는 차를 산다면 꼭 두 자동차 중 하나로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나는 스포티지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쏘울이었다. 지금은 도통 팔리지 않아 도로에서 찾아보기 힘든 쏘울을 이렇게 제주도에서 마주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준비해 온 초보 스티커를 차량 뒷유리에 정성스레 붙이고 운전석에 올랐다. 차에 올랐을 때의 첫 감정. 긴장 그 자체였다.

  

  사실 숙련자와 동승하지 않고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운전 연수를 받은 것도 어언 3년 전. 배 속이 살살 아파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수십 번 숙지한 대로 천천히 처녀 운전을 준비한다. 사이드미러 체크, 룸미러 체크, 좌석 포지셔닝... 드르륵, 완료. 자, 가볼까? 액셀 페달에 발을 올리자마자 경고등이 켜진다. 안전벨트 매라, 안전벨트! 이제는 손바닥에도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그녀는 긴장하지 말라고 온화한 표정으로 다독이고 있지만 한 손은 보조석 손잡이를 꽈악 쥐고 있는 채였다. 쏘울도 영 못 미더웠는지 계속해서 계기판에 이런저런 경고등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이 와중에 내비게이션은 영어로 흘러나온다.

  

  괜찮을까, 우리?



  3. 바다가 열리다

  

  제주에서의 첫 드라이브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스릴 넘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연습하고 온 아버지 차보다 한참은 작은 크기에 좀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속 페달을 밟을 때마다 훅훅 튀어나가는 통에 계속 식겁했다. 그때마다 보조석에선 헉하고 놀라는 소리가 났다. 핸들을 꼭 쥐고 잔뜩 긴장한 채 얼마를 갔을까. 어느 순간 우리 앞으로 바다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호테우 해변이었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바다를 향해 달려나갔다. 하얀 모래가 깔린 백사장 뒤로 파란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여기가 제주의 바다구나. 제주 바다는 인천의, 여수의, 강릉의 바다와도 달랐다. 말갛게 상아색을 닮은 바다가 눈에 거치는 것 없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내 옆에 선 그녀가 선글라스를 꺼내 코 위에 턱 걸쳤다.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그녀가 씩 웃었다.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그녀와 제주 바다. 제주도에 오기로 한 목적은 이 순간 이미 달성되었다.

  


  4. 제주에 둘이 오다

  

  그녀와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보다가 해변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제주도에는 관광객을 겨냥하고 만든 예쁜 카페들이 많다고 했다. 제주 해영은 우리가 고른 첫 번째 제주 카페였다. 사장 부부 내외의 이름을 딴 제주 해영은 각 테이블마다 방명록을 쓸 수 있도록 노트와 색연필을 비치해놓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 예쁜이와 한 페이지씩 들뜬 기분을 적어 넣었고 그것은 그대로 이 여행기의 제목이 되었다.

  

  '제주에 둘이 오다'

  

  다음은 목장이었다. 성 이시돌 목장.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딴 목장에는 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무방비하고 나른한 말들의 모습에 그녀도 나도 신이 났다. 말들도 저희를 보는 우리를 무관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른한 오후의 휴식을 방해하는 인간들이 언짢을 법도 한데 말들은 묵묵히 풀만 뜯었다.

  

  저녁에는 흑돼지를 먹었다. 제주 시내로 들어와 에스컬레이터까지 딸린 거대한 2층 고깃집에 차를 댔다. 여행 첫날의 피로감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과하게 시켜서 (4인분) 몽땅 먹어치웠다. 시끌벅적한 고깃집에서 입에 한가득 고기를 밀어 넣으니 만족감과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내 앞에서 야무지게 쌈을 싸 먹고 있는 그녀가 정말 좋았다.

  


  5. 제주에서의 첫날밤

  

  숙소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우리의 숙소는 제주도 특유의 지형인 '오름' 사이에 위치한 리조트로, 쉴 새 없이 커브가 이어지는 산길에 있었다. 날은 이미 기울었고 도로에는 가로등이 뜨문뜨문 서 있어서 딱 한 치 앞만 볼 수 있을 만큼 캄캄했다. 아직도 훅훅 튀어나가는 액셀러레이터에 익숙해지지 못한 초보는 핸들에 얼굴을 처박은 채 집중했다. 보조석의 그녀 역시 잔뜩 긴장한 채 차 앞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핸들을 좌우로 바쁘게 돌려가며 나아간 지 30여 분, 드디어 리조트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반가운 광경이었던지! 넓은 거실과 2개의 방, 커다란 식탁과 소파가 갖추어진 객실에서 우린 나란히 짐을 풀고 앉아 첫날 여행의 여독을 풀었다.

  

  이날 밤, 불현듯 잠에서 깼다. 은은한 달빛이 얇은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평소에 내 방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제주의 밤. 내 곁에선 그녀가 왠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미간의 주름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침이 오지 않아도 좋겠다고, 이 밤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간절히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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