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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01. 2019

봄을 맞으러 내려가다

여수 여행

 

  

  0. 여수 밤바다

  

  여수의 밤은 깊었다. 여수의 밤은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넉넉함으로 소리도 빛도 그 안으로 흡수해버렸다. 바다도 밤에는 그 경계를 어둠 속에 지웠다. 이쪽 해변에서도 저 건너 해변에서도 향락의 불빛이 환하게 빛났지만 빛은 밤의 바다에 닿기가 무섭게 급속도로 소멸해버렸다. 밤늦도록 흥청거리는 여행객들의 웃음소리도 흔적 없이 지워졌다. 잔 바람에 찰랑이는 물결 만이 귀에 와서 닿았다. 그것이 밤의 소리였다. 여수의 밤바다는 깊고 고요했다.

  

  두 번째 여행기. 봄을 맞으러 여수에 내려가다.

  


  1. 남쪽으로 가자

  

  봄을 좀 더 빨리 맞이하기 위해 결정한 여행이었다. 봄은 남쪽에서부터 올 테니까 남으로 가자,라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번 겨울은 너무 추웠다. 멀리 대륙에서 넘어온 찬 공기는 겨우내 한반도에 단단히 틀어박힌 채 모든 것을 꽁꽁 얼려버렸다. 기상청 관측 이래 수십 년 만의 추위라는 뉴스 앵커 멘트에 신물이 날 때쯤 여행을 결정했다. 예산을 여유롭게 잡고 일정도 한껏 느슨하게 짰다.

  

  계획을 꽉 조여서 알차게 다녀오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의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A4 용지 반절을 겨우 채운 일정표를 일행들에게 던져주었다. 슥 한번 눈길을 주고는 별말들이 없다. 생각이 없기는 그들도 매한가지였다. 아무튼 남쪽으로 가면 여기보단 덜 춥지 않을까? 운이 좋으면 남들보다 일찍 봄을 만날지도 모르잖아. 어리석은 내 말에 친구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2. 바다가 우릴 부를 줄 알았지

  

  여수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다. 4시간 10분이라는 예상시간을 한 시간은 훌쩍 넘기고 나서야 여수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다 있었지만 하늘은 다행히 맑았다. 기상청의 한결같음에 이제 신뢰가 간다.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은 역시 바다였다. 택시를 타고 바다로 가주세요, 하는 건 왠지 싫어 무작정 걸었다. 코 끝을 간지럽히는 바다의 짠 내음, 끼룩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 소리. 우리를 바다로 인도하는 표식들을 쫓다 보면 금방 바다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믿었다.

  

  바다로 회귀하는 본능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바다는 한 시간을 헤매고 바다낚시 용품점을 보고 찾았다.

  


  3. 통통배가 너무 좋은 나, 어부가 되어야 할까요?

  

  한 시간 만에 찾은 바다는 길가에 도열한 바다낚시 용품점들 사이로 섹시한 푸른빛을 살포시 내밀고 있었다. 요염한 여성이 살며시 드러낸 어깨라도 본 사춘기 소년들처럼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바다를 향해 뛰었다. 여수의 바다는 하늘을 닮은 상아색도 우아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색도 아니었지만 남해, 나름의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파란색과 녹색이 불균형하게 섞인듯한 청록의 빛이었다.

  

  색깔만큼이나 바다는 무겁게 출렁였다. 위에는 바다낚시에 쓰이는 통통배들이 얌전히 떠 있었다. 천둥호, 태양호, 아르테미스 등 하나같이 거창한 이름이 붙은 통통배들은 그러나 오징어를 꾀기 위한 목적인 듯한 백열전구들을 앙증맞게 매단 채 친근한 얼굴로 싱글거리고 있었다. 배를 보는 우리의 표정도 자연스럽게 천진해졌다. 친구 중 하나가 "야, 우리도 배 하나 빌려서 바다로 나갈까?" 의견을 내놓았다. 얼토당토않는 말에 모두들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속으론 다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의견을 묵살당한 친구가 "춥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재차 의견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모두들 한목소리로 수긍했다. 떠나면서 나는 계속해서 바다를 돌아보았다. 통통배의 이물에 우뚝 서서 남해로 나아가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4. 축제가 끝난 후

  

  여수에서 엑스포가 있었다는 사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 기억이 버스 노선표를 살펴보다가 되살아났다. '2012 여수 세계 박람회'. 축제가 끝난 엑스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손님을 다 떠나보낸 숙소동과 상점들은 기울어진 폐가처럼 스산했다. 녹이 슨 철제탑 사이로 바닷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황량한 엑스포장을 쓸쓸하게 휘돌았다. 축제 동안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을 '빅 오'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상한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 찼을 반원의 관람석에는 몇 명의 사람들만이 앉아 햇빛을 피하고 있었다. 커플 하나가 구석진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입을 맞추다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떨어졌다. '계속 더 하셔도 돼요.' 마음속으로 응원하였다.

  

  엑스포장 한편에 크게 자리한 아쿠아리움에도 들렸다. '아쿠아플라넷 여수'에는 여전히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 붐비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오직 '벨루가(흰돌고래)' 뿐이었다. 크고 단조로운 구성의 아쿠아리움을 따분하게 걷다가 코스의 후반부, 벨루가를 만났다. 짙푸른 수조 속을 벨루가 두 마리가 하얀 빛을 뿌리며 유영하고 있었다. 물 바깥으로 솟구쳤다가 돌연 방향을 바꾸어 바닥을 쓸듯이 헤엄쳤다. 나는 수조 유리에 바싹 붙어 하얀 빛줄기를 눈으로 좇았다. 이제 그만 가자며 일행들이 잡아끌었지만 그녀(혹은 그)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 하얀 잔상은 여수를 떠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5. 그리고 여수 밤바다

  

  남들 하는 것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케이블카에 올랐다가 돌산대교를 넘어 다시 바다로 오니 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아까 봤던 통통배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술이나 먹자는 친구들의 말에 못 이긴 척 따라왔다. 포장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쪽 해변은 너무 밝고 소란스러웠다. 포장마차마다 행락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는 종류도 수준도 비슷했지만 알 수 없는 차이가 있는지 가게에 늘어선 줄은 저마다 길이가 삐뚤빼뚤했다. 일행은 3만 5천 원 해물 삼합과 3만 3천 원짜리 해물 모둠을 두고 다투었다. 그들이 한심해서 한 마디 던졌다. "골뱅이는 꼭 시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포장마차를 나와 백사장에 나란히 앉았다. 여수의 밤은 깊었다. 밤은 바다 위의 섬들마다 빼곡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섬은 조용히 그 경계를 어둠 속에 지운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여수의 바다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잘게 찰랑이는 파도 소리만이 귀를 간지럽혔다. 백사장 바로 뒤로는 향락의 밤이 떠들썩하게 지나고 있었지만 바다는 이에 아랑곳 않고 고독하게 침잠했다. 이 날 계속해서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던졌던 친구가 나지막이 '여수 밤바다'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닥치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여수의 밤이 조용하게 깊어갔다.

  

  두 번째 여행기는 남쪽에서 쓰였다. 남쪽도 아직 봄은 멀었지만 봄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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