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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deep seated person Aug 05. 2024

시간을 보내야 사는 남자

마흔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여행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역시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약을 복용한 뒤 첫 여행이었다. 일상과 다른 그곳에서 나는 어떻게 느낄까 궁금했다. 혼자 갔어야 했는데 뭐가 무서웠는지 직장 동료와 동행하는 바람에 약이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잘 모르겠다. 여행 중에는 지루하고, 따분했다고 생각했지만 다녀온 후의 일상과 비교해 보니 그때 느꼈어야 했을 사소한 행복들이 있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로 돌아온 이곳에서 내 일상은 너무 따분하고 졸렸다. 여행을 다녀온 후 첫 주말마저 지겹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일요일 오후 아내와 아이는 집을 비웠고 나는 아침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해했다. 주말 내내 온 비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나도 아내의 차를 타고 한림읍 어딘가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나가지 못했다. 따라 나가고 싶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적당히 비가 그쳤다.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혼자 갔을 때는 늘 에스프레소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가라앉고 불안했던 기분이 커피를 마시자 살아났다, 비가 갑자기 잔뜩 몰려와 카페의 유리창에 고여 떨어지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좋았다. 카페에 손님이 몰려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자전거 뒷바퀴에 문제가 생겼지만 평소와 다르게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어제 샀던 포카칩을 조금 먹었다. 바삭한 포카칩을 씹으며 작은 행복감을 느낌과 동시에 일상이 지루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복용하기 이전에는 깨어나 잠이 들 때까지 생각에 지배당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보통사람과 같이 불안함을 느끼는 것일 것이고, 그 시간에 내가 충실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무엇이든 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는데, 시간을 죽일 생각만 하느라 재미도, 즐거움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일 수 없는 시간을 죽이려고만 하니 사서 고생한 셈이다.



보통 사람들도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고 있는데, 왜 깨닫지 못했을까.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지난밤 개어 두었던 빨래를 조금 정리했다. 포카칩을 더 먹었다. 어제 사둔 다른 과자도 먹었다. 곧 아내와 아이가 집에 도착했고, 맥도널드에서 사 온 햄버거를 나눠 먹으며 대화했다. 사소한 행복감을 조금 느꼈다.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 기분이 당류를 과도하게 섭취한 것 때문인지, 시간을 죽이려는 압박감에서 벗어난 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새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조금은 접어둘 수 있었다. 오랜만에 글을 펼쳐 수정하려니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약을 복용하며 변하게 된 나에게 제일 필요했던 것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일반인의 일상을 구독하며 비어버린 내 머리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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