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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deep seated person May 21. 2024

잘난 척하는 사람이 되는 법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허우적대며 지나온 관계들의 바다를 되돌아봅니다.

고까운 사람이 되려면 남에게 미움을 받는 것에 개의치 않아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난 그렇지 못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했으면 좋겠고 적의를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상당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다른 사람의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런 문제로 적개심을 가지거나 좋지 않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같은 불안함에 휩싸인다. 이런 불안한 내 상태를 거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런 불안함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지난 글에서 고까운 사람이 되자며 너무 쿨하게(너무 늙은 표현인 것 같다.) 인정하는 척했지만, 절대 고까운 사람이 스스로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현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게 긍정적일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이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고, 내 목소리가 공간에 울릴 때 나에게 집중될 시선이 무섭다. 그런데, 내 감정과는 다르게 눈에 띄는 외모적(잘생겼다는 말이 아니다. 절대.) 특성으로 인해 내가 원하지 않는 관심을 받는다.(사실 나 같은 건 아무도 안 쳐다볼 수도 있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작아요? 덩치랑 안 어울리게? 좀 큰 소리로 얘기해 봐요.


언젠가 친구에게 내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안보였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져 잊힌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내 바람과 다르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나 역시 인간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 사이에서 적절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지난 글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에 느끼는 안락함도 있지만 반대로 본능적인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가족이 있지만 그들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다른 류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친구라든지 지인이라고 부르는 관계들 말이다.

 


하지만, 꼭 내 본능의 욕구가 내 상황과  일치할 수 없는 것이, ADHD를 가진 나에겐 치명적인 언어교환장애가 있다. 익숙한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눌 때 하지 않았으면 좋을 말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필터링 없이 입으로 주절 거리게 된다. 아마도 내 성향과 관련된 것이겠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마다 애쓰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보통 나는 사람들과 나눌 대화를 미리 정해둔다. 주제와 반응 정도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 이야깃거리를 꺼내 쓴다. 이런 것들을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진정한 대화는 아닐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말 좀 크게 똑바로 들리게 하라니까? 우물거리지 말고 일단 얘기를 해.


이 언어교환장애가 단순히 ADHD의 증상이라기보다는 ADHD를 가진 내가 겪어오며 자리 잡혀버린 일종의 습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늘 말을 똑바로 빨리 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속도에 맞춰 말을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뭔가 내뱉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준비되지 않은 입을 열어야 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의미한 노력들을 하다 보면 대충이라도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이 동원되는 것 같다. 내가 쓰는 그 방법도 이런저런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옳은 방법은 아니겠지만.


약을  복용하면서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아직 대화다운 대화를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서 이 습관들을 조금씩 바꾸고 싶다. 그래서 요즘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늘리려 애쓴다. 여전히 나에겐 어렵지만 이런 내 모습이나 습관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진 않을지 걱정이 된다. 아이에겐 최대한 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 온전히 스스로의 모습을 자신이 만들게 해주고 싶다. 어딘가 부족하거나 망가진 결함이 없도록, 그 결함마저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 부모의 과욕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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