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놓다

공부 묵상 하나,

by 현재

사람의 욕구란 복잡하고 질척인다. 몸이 끊임없이 활동할 수 있게끔 욕구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게끔 설계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식도 욕망의 대상이라서 사람들은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거나, 혹은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거나, 아니면 그러지 못한 자기 자신(과 가진 이들)을 부정한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살아가면서 쓸모도 없는 걸."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도 때로는 좋은 (건강한) 방법이다.


아마도 공부할 팔자인 사람들은 그 부정 한 번을 제대로 못해서 이에 매진하는,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굴레에 갇힌 사람들이리라. 내심 알고 있을 거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이 의심의 잔존이 내게도 있다는 걸. 그럼에도 정말 '팔자'란 게 있는 모양인지 참 뗄레도 떼어지지 않는다.


버스 한 자리에 앉아 내가 요즘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나하나 읽어가며 방향성과 윤곽이 선명해짐을 느끼다가도, 이 싸움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가능한 나로부터 거리를 두어 스스로를 바라볼 줄도 알아야 했다. 이런저런 잡념을 지나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떠올린 게 지금 가진 조악한 지식 안에서 다음의 공부 로드맵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그쯤에는 아마 이런 공부를 하겠지, 하고 싶다."


오늘은 책상 앞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는데, 계속 『악의 상징』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공부보다는 내일의 공부가 되어야 할 자료인데, 책과 지식이 주는 매혹은 내 팔자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라, 결국은 이 책을 꺼내 침대 옆 작은 협탁에 올려두었다. 비슷한 주제의 글을 반복적으로 읽을 때면 가끔은 이런 일탈도 필요하다고 합리화를 해본다.


폴 리쾨르, 『악의 상징』, 국역본. 양명수 선생에 의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되었다.

『악의 상징』은 리쾨르를 철학과 신학계의 유명인사로 남기게 된, 그에게도 기념비적인 저작일 것이다. 리쾨르는 몰라도 이 책을 아는 사람은 꽤 많고, 리쾨르를 『악의 상징』의 저자로만 아는 사람도 꽤 많다. 이 책을 기점으로 리쾨르는 '해석학자'로 불리게 된다.


리쾨르를 전공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당시 가까운 몇 동지에게 내 생각을 공유했었다. 리쾨르의 저서는 원체 마흔 권이 넘기도 하고, 2005년에 타계하여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책이 더 많다. 번역서부터 차근차근 구매하던 와중에 지금은 연인이 된 이로부터 이 책을 받았다. 그래서 내게는 (연인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각별한 소장품이다. (이 글의 배경 사진으로 삽입한 것은, 어머니와 함께 방문한 제주도의 한 책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 담긴 시나리오북 때문에 찍었다. 뤽 베송의 <레옹>은 내게 소중한 영화인데, 또 얼마 전에 연인과 그 영화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감사하고 각별한 추억이 될 것이다.)


번역되었지만 절판되어 소장하지 못하고 있는 책은 한 권이다. 『텍스트에서 행동으로』가 그것인데, 다른 책은 중고 매물로서 가격을 얹어서 구매한 것도 많지만, 이 책만큼은 중고가가 심하게 비싸다.


'악'의 문제는 더 중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임을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악인들이 버젓이 중책을 맡아 제 지위와 권한을 휘두르고 오남용 하며, 옳고 그름의 기준조차 상실한 채 자신의 행위와 사상에 그럴싸한 변명과 근거를 덧붙이고 있다. 악은 결코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하여튼 오늘의 묵상(?)은 지식이 주는 마력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급하지 않은 책을 펼쳐보는 나를 합리화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현세의 악인들이 그러하듯 그럴싸한 변명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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