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놓다

공부 묵상 둘,

탄핵소추안 가결, 메를로-퐁티, 프랑스 철학 등.

by 현재

이제는 어제가 됐지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그간 누구보다도 고생한 국민, 이웃 분들. 야당 정치인 190여 명과 정치권, 언론 종사자들 모두 고생하셨고, 함께 남은 싸움을 단단히 이겨나가길 소망해 본다. 또 정당 정치에서 당론을 부정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가결에 찬성한 국민의힘 의원들과 참석한 모두에게도 박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숙고, 배려, 존중, 인정과 같은 가치들이 함께할 때에야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념이 된다. 우선은 국가적 혼란을 야기한 현 정부에 대한 처우가 결정되기를 기다려야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아니, 이제는 건강하고 선의로 충만한 경쟁이, 더 나은 이념과 철학으로 무장한 진짜 '정치'가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윤석열 정부가 이른 시일 내에 막을 내리더라도, 대한민국이 끝나는 것은 아니기에 '그 이후'를 미리 준비하고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소장파의 드높은 가치를 언제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지금이야말로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이 탄생하게 된 기존 정치의 인재 상실 현상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 누구도 이 새로운 인물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이 당선될 수밖에 없던 기존의 정치풀은 얼마나 참담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정치풀을 용인하고 만들어준 국민들의 어깨가 조금은 더 무거워져야 할 시기이다.


한국의 철학자들도 현 세태에 입장을 표명한 시국선언문을 게재했다. https://hanchul.org/board/notice/article/252204


아무튼, 무거운 이야기로 운을 뗐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가벼운 일상 공부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올해 읽은 가장 호흡이 길고, 볼륨이 큰 저술은 아마 이 책이었을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은 '현상학'을 가운데 두고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이를테면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리쾨르, 레비나스 등이 현상학자인 동시에 현상학의 소개자였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현상학이 이 사조의 중심에 놓여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 저서엔 으레 관례처럼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체적 정의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이 삽입되어 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메를로-퐁티가 후설 이후 가장 현상학의 중심 캐치프라이즈("사태 자체로" 등)에 충실한 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사태 자체를 다루기 위해 사태가 처음으로 만나는, 사태에 놓이고 사태임을 알게 되는 '지각하는 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에 그 생각의 근거를 두고 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행동의 구조』, 김웅권 옮김, 동문선.

그리고 메를로-퐁티의 이러한 작업은 철저한 병행 학습에 의해 이루어졌다. "과연 이 책은 철학책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 『행동의 구조』와 함께 말이다. 당대 기준의 고전 심리학과 최신 심리학 사이를 횡단하며 행동의 구조를 해석하는 책이다. 각종 실험 기록, 사례, 그리고 심리학 용어들이 난무하니 읽기 쉬운 책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지각의 현상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행동의 구조』를 탐독해야만 한다. 『지각의 현상학』 속에 『행동의 구조』 속 연구가 여러 차례 중요하게 인용되기 때문이다. 『지각의 현상학』이 메를로-퐁티 철학의 근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저서 『행동의 구조』라는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간의 여러 리뷰를 살펴보면 두 저서의 번역에 대해 지적이 많다. 하지만 짧게나마 몇 문단이라도 직접 번역을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대체로 번역 과정에는 자의가 들어갈 여지가 넘친다. 무엇보다도 원저자가 그리 유려하고 분명한 서술을 하지만은 않기 때문도 있다. 우리는 번역서에서 종종 "...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역자는 이를 ~라고 이해하는데, 그 근거는 ..."와 같은 역주를 찾아볼 수 있다. 외에도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단어나 대명사, 지시 표현, 문법 구조 등이 그런 양상을 낳는다.


이에 나는 번역서의 번역질을 평가하는 것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받아들이는 바이다. 사실 번역서가 나오고 읽힐 정도의 책들은 이미 나름의 연구 수요가 있는 것들인데, 그렇다면 필히 부분 부분 발췌된 대안 번역이나 대안 번역어가 선재하기 마련이다. 메를로-퐁티의 경우에는 이미 다음과 같은 대안 내지는 안내가 존재한다.

조광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이학사. 부제가 언급하듯 『지각의 현상학』을 강해하는 책이다.

외에도 조광제 선생은 관련된 지적을 <교수신문>에 게재한 바 있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651

류의근 선생이 이에 대해 답한 글이 있다고 하는데, 왜인지 검색을 해도 찾아지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조광제 선생과 달리) 번역이 잘못됐다는 코멘트만 남기는 독자들의 평이 외려 신빙성이 없다. 최소한 근거 있는 지적과 대안 제시는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몇몇은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번역에 불만을 제시하곤 하는데, 대체로 이런 연구서들은 으레 그렇듯 글이 어렵고, 원저자도 그렇게 모든 걸 떠먹여 줄 생각이 없다.


아무튼 메를로-퐁티가 "몸"을 철학적 탐구의 핵심 주제로 끌어올린 것은 철학사적으로 유의미한 작업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작업이 프랑스 철학의 고유성을 방증한다고 생각하는데, 의식이 분리할 수 없는 지평인 '몸', 곧 '육화된 의식'의 문제는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오랜 탐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마르셀. '육화된 의식'을 다루는 철학자이다.
칼 야스퍼스. 독일철학의 역사에 남은 인물이지만, 마르셀의 짝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폴 리쾨르가 그렇게 이 둘을 읽어내기도 한다.
쇠얀 키르케고르. 앞선 둘의 사상적 원류가 되는 인물이다.
장 폴 사르트르. 인물 소개를 이어나가자면, 마르셀의 가장 큰 정적이자 이념적 적이지 않을까. 실존주의를 유/무신론으로 나누기도 한 인물이다.
황수영,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 갈무리.

이쪽 공부를 하는 학도들 사이에서, "그 프랑스 근현대철학 갈색 책"이라면 많이 알아듣곤 하는 연구서이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확장/보완한 저서라고 하는데, 국내에 소개된 문헌 가운데 근현대 프랑스철학을 다루는 것 중에서는 가장 깊이 있는 저술로 오래 자리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프랑스가 오래도록 이어온 '신체'와 '의식' 사이의 긴장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아직 다 읽진 못했고, 정작 저자가 가장 공들이지 않았을까 싶은 베르그송-들뢰즈 부분을 남겨둔 상태이다.

프레데릭 보름스, 『현대 프랑스 철학』, 주재형 옮김, 길.

이 책은 '현대 프랑스'에서의 철학을 주제로 한 것이다. 역자가 당신의 지도교수께서 쓴 저서를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이 책도 두루두루 읽혔으면 하는 책이다. 이 또한 아직 완독 하진 못했으나, 기회가 된다면 황수영 선생의 저술과 함께 읽어가며 '프랑스 철학의 근대와 현대'와 같은 주제로 스터디를 해보고 싶다.


어쩌다 금전 여유가 생겨, 벼르고 벼르던 국회도서관의 복사 시스템을 활용한 참이다. 총 5권을 요청했고, 가장 가까운 시일에 독서를 기대해 볼 것은 그중 다음의 두 권이다.

사라 베이크웰,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조영 옮김, 이론과실천.

프랑스에 현상학이 수입되는 과정을 서술한 책인데,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어진다. 레몽 아롱의 사르트르를 향한 티배깅(...)이 프랑스 철학사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이 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김승철, 『역사적 슐라이어마허 연구』, 한들출판사.

다른 하나는 이것인데, 이 역시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베이스로 한 책이다. 내용을 많이 압축했다고 들었다. 나는 저자를 학회에서 직접 뵌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책을 언급하셨다.



아무튼 이번 기록에서는 메를로-퐁티 현상학이 주연을 차지한 것 같다. 다음 기록을 언제 남길지는 모르겠으나, 시급한 과제들이 조금 더 진척되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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