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놓다

공부 묵상 셋,

by 현재

문제의식이 죽어버렸다는 생각만큼이나 불쾌한 일은 없다. 이런 인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니체가 그랬던가. 혼돈을 들여다보는 이는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만 한다. 공부하고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미로에 도전하는 일 같아서, 시작 전에 미로의 거대하고 웅장한 자태와 그 보상을 볼 때까지는 선명했던 목적의식이 미로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 이르러 내가 지금 왜 이곳에 있는지 헷갈리곤 하는 것이다. 몸corps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는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이런 주제를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이 텍스트들과 감히 싸워보는 이유는 무엇이던가. 나는 나에 대해서도 계보학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2023년에 <21세기 인문가치포럼>이라는 공모전(컨퍼런스)에 참여했었다. 요컨대 인문학의 전망에 대한 것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공모전이 요구하는 바였는데,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말 그대로 흥미를 갖고 읽어오던 것들을 응축하여 '배설'해냈다. 그건 아주 모양새 빠지고 자의적이고 조각조각을 기워낸 것처럼 너저분한 무언가였지만, 그럼에도 아주 솔직한 무언가였다. 나는 그 논문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한다; 파편들의 집합은 다른 파편들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꽤나 당차게 그렇다고 말하려 했다.


배설물. 건강하지도 일관적이지도 규칙적이지도 않은 식단이 토해낸 것에 어울리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아주 나다운 무언가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 멋대로 씹어서 삼켜낸 것 아니던가. 그래서 나 스스로도 알면서 모른다고 부정해 오던 비판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과분한 찬사와 함께 내가 눈 돌렸던 부정을 여지없이 쏟아내 주신 선생님 덕분에 눈이 띄었다. 나는 정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규칙도 주기도 건강도 없었다. 그럼에도 꽤 잘 소화해 낸 나는 기특하지만 어른이 되는 걸 피할 수 없듯이 나는 내 생각들을 정초 해나가야만 한다는 의무와 부딪혔다.


철학이라는 작업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것은 원시인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바닥에서부터 문명을 창조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 테이다. 철학이라는 작업이 기쁘고 보람찬 것이라면, 그것은 앞서 문명을 이루고자 했던 이들이 남기고 떠난 보석과 건축물들이 내게 도움을 주고, 그럼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과감히 나는 나를, 나와, 내가 정초 해보려는 용기를 얻었다. 아주 선명하고 찌릿한, 부드럽고 따끔거리는, 뜨겁고 차가운, 세상과 가장 처음 만나는 몸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창조의 욕동이었다.


광적인 집착, 열광과 환희로 가득 찬 마음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미로를 돌다 보니 어느덧 사실 나는 미로를 통과하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 미로와 하나가 아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무렴 여기를 나가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느껴져서, 이 미로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과 흙바닥과 그 사이사이 피어난 풀잎과 겨우 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하다. 불쾌하다. 키르케고르는 정열이 죽어버린 시대에 대해 말한다. 지금 나는 나로서의 정열이 죽어버렸다. 철학을 하면서 가장 뛰어난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유일한) 재능은 텍스트를 읽고 심장이 뛰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내게는 아주 불쾌한 감정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어제는 손이 닿는 대로 『성과 속』을 조금 읽어보았다. 군대에 간 친우가 내게 남기고(팔고) 간 책이라 그런지 페이지를 넘기는 그 감촉이 애틋했다. 넘어가는 페이지가 불게 한 옅은 바람은 괜스레 그 친우의 향을 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불씨가 죽지 않았다면 바람을 불어야 한다. 바람이 불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폐를 쥐어짜 내어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