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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재 Aug 05. 2024

'그저 사유'의 <과학중독 사회>에 대한 고찰

비판과 검토

  친애하는 마음을 담아, 자주 학문적 과정과 성취를 공유하는 '그저 사유'의 최근 글에 대한 고찰을 남긴다.

  고찰의 대상이 되는 원문은 아래의 것이다.

https://brunch.co.kr/@095285961be34f2/3


  '그저 사유'(이하 '저자'로 통일하여 표기)는 현시대 대중들의 학문 소비 활동을 '과학중독 사회'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논자(본인)는 먼저 다음과 같은 통감을 표시하고 싶다.


  '"과학"중독 사회'에서 "과학"의 자리에 무릇 과학뿐만이 아니라 많은 주제적 단어들이 들어가도 손색이 없는 글이라는 데에서 저자는 적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그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바이다. 소위 '가벼운 소비'로 일컬을 수 있는 대중들의 향유가, 오히려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얕은 지적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일생이 담기고 뼈와 살을 갈아 넣는 고역이 또 다른 누군가의 유흥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보기 좋지만은 않다. 어떤 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업이 그렇게 소모되기만 한다면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중독 사회', '"철학(혹은, 인문학)"중독 사회',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명언"중독 사회' 등 어떤 말을 넣든 현대 사회의 소모적 행태에 대한 적절한 통찰이 될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이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무언가를 피상적으로 소모하고, 그것에 대한 실질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적 이해는 결여하고 있다는 데에는 논자 역시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소모가 특히 '과학'에 치중되어 있음 역시 동의한다. 물론 그 치중된 유행은 언제가 되건 순식간에 변할 것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비판이 마냥 적극적으로 옹호될 만한 것인지는 유보하고자 한다. 그 이유를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


1) 저자 본인도 말하고 있듯, 그러한 피상적 이해가 실용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시로 삼는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때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 등이 그러하다. 물론 대중들이 소모하는 콘텐츠가 모두 이러한 실용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 그런데 1)에 이어서, 생사의 관점이나 물질적 관점 등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적하고자 한다. 누군가 어떤 과학 교양서에, 인문학 교양서에 쓰인 한 경구를 보고 삶의 의미를 다잡거나,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어 생을 윤택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 아닌가?


3) 지적 탐구는 전통적으로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대중의 지적 호기심은, (이 역시 경제적 하방이 상승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지적 탐구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이 관심이 지적 탐구자들의 연구 활동을 촉진시키거나 (특히 경제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실질적인 지적 탐구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소모하지 않는다면, 탐구자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결국 지식의 상아탑은 '이미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영원히 그들의 현학 놀이의 대상으로 남아야 하는가?


4) 결국 표상적 이해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기에, 깊이 있는 연구를 추구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다. 생존과 경제의 관점에서만 놓고 본다면 이는 선순환이다. 물론 언제나 표상적 이해만을 추구하고, 그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표상적 결과물만 쏟아내는 이들을 높게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개인의 태도 문제에 가까우며,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것도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교차 비판이 오가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적극적인 대중, 즉 그 분야의 종사자가 아니면서도 최소한 '준-전문가'의 수준에 해당하는 대중이 없다고 볼 순 없다. 때로는 그들의 통찰과 비판이 더욱 객관적이고 냉험하기도 하다.


5) 우리는 모두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비-전문가임을 인정해야 한다. 종사자가 아닌 이상 해당 분야에 대해 그 종사자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긴 어렵다. 그러한 노력을 강요하는 것 역시 폭력적이다. 그들의 애쓰는 일상과 쉬어가는 여가를 갈아 넣으면서까지 전문성을 추구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며, 학문 종사자들 역시 자신의 종사 분야 바깥에서는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요즘 사회인 가운데 전자기기로 음악을 향유하지 않는 이는 없을 거다. 그런데 이 사회인들이 전자기기라는 매개에 대한 원리적/이론적 이해나, 실제로 소모하고 있는 음악이란 대상에 대한 원리적/이론적 이해를 갖추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예술을 피상적으로만 소모하는가? 어떤 음악인이 우리더러 "당신들은 예술을 겉핥기식으로 소모만 하지. 실제로 음악의 숨겨진 원리나 이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당신들의 그 피상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평가가 작품의 예술성을 침해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데에 우리는 수긍하고 머리를 조아리면 그만일까? 나에겐 이것이 소소한 행복이다. 음악인은 아니어도 음악이 없으면 삶이 지금처럼 즐겁진 않을 것 같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들이 과학을 소모하거나 어떤 주제를 소모하는 것 역시 이와 동일한 구조 아니겠는가?


  오지랖을 부리자면, 저자가 아도르노를 읽어보는 것이 어떤지 제안하고 싶다. 논자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아도르노가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것과 유사한 맥을 느꼈다.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 이성이 끝내 대중문화라는 매개를 통해 자연을 넘어 인간 외면과 인간의 내면을 지배해 나가는 우울한 운명을 논한다. 그리고 이 운명의 족쇄는 계몽의 변증법을 따라 더욱 촘촘하게 인간을 옥죄어온다. 저자의 논지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대중문화라는 필연적 선택지에 굴복하고 있다는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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